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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정족산 전등사(傳燈寺)

여행자솔향 2013. 9. 10. 18:00
 
 
 
 정족산 전등사(傳燈寺)
 
 
 
 
전등사가 창건된 것은 서기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이 서기 372년이므로 지금은 그 소재를 알 수 없는 성문사,
이불란사(375년 창건)에 이어 전등사는 한국 불교 전래 초기에 세워진 이래,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도량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 전등사를 창건한 분은 진나라에서 건너온 아도 화상이었습니다.
당시 아도 화상은 강화도를 거쳐 신라 땅에 불교를 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아도 화상이 강화도에 머물고 있을 때 지금의 전등사 자리에 절을 지었으니 그때의 이름은 ‘진종사(眞宗寺)’라 하였습니다.
   
 
 
정족산성(삼량성)
 
이 성은 고대 토성의 흔적을 잘 보여주고 있고 단군의 세 아들인 부여· 부우· 부소가 쌓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성 안팎을 할석으로 겹축했으며 할석 사이마다 할석 부스러기로 쐐기를 많이 사용한 구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후 토성 자리에 표면이 거친 할석(割石)으로 성을 쌓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해발 222m인 정족산의 정상에서 동향한 계곡을 포용하고 동남향한 계곡에 수구와 남문이 있습니다.
성벽이 꺾어 도는 곳마다 10여 개의 곡성을 이루며,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치성(雉城)이 마련되기도 하였습니다.
  
 
 
사찰로 가는 길이 포장도 안된 흙길입니다.
 
 
 
 윤장대(輪藏臺)
 
윤장대를 한바뀌 돌리면 불경을 한 번 읽은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불경은 일반인들에게 매우 어렵게 느껴지며 시간이 없어서 읽지 못한다는 사람도 많습니다.
보통 팔각형으로 되어 있는 윤장대는 팽이처럼 돌릴 수 있게 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불경을 넣어둡니다.   
윤장대는 글자를 모르거나 불경을 읽을 시간이 없는 신도들을 위하여 만들어진 불구로, 중국 양(梁)나라의 선혜대사가 처음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죽립다원
 
 
 
무설전(無說殿)
 
수도권 대표 고찰이 처음 불사를 계획한 것은 2008년  문화재보호법에 묶여 애당초 경내 신축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현상 변경 방식으로 템플스테이 건물 아래를 파내 반지하의 식당을 만들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건물을 더 짓지도 못하는데 식당 보다는 설법전이 필요하지 않느냐는 의견이 나왔고,
전등사의 명성에 걸맞은 법당을 고민하는 단계에서 주지인 범우 스님이  한국 사찰의 미술 작업에 이의 제기를 해온 동국대 오원배 교수를 만난 것이 계기였습니다.
 
 
 
 
 
 
 
 
 
 
 
처음에는 불상, 불화 정도만 새롭게 해볼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공간 구성 자체를 새롭게 해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장윤 스님의 지원에 '무설전 창작단'이 꾸려져 지난해 3월부터 설계가 시작됐다.
불사는 사찰의 의뢰로 불교미술 장인들이 전통 방식에 따라 진행하는 것이 상례이나 지탱하는 기둥만 남기고 내부 콘텐츠를 모두 예술가들에게 맡긴 것이었습니다.
 
"전통 사찰의 단청이나 불상은 화려하고 무겁고 엄숙한 것이 일반적입니다.
젊은이들이 갈수록 불교를 외면하는 것도 이런 과도한 무게감이 한 가지 이유입니다.
김 교수는 그래서 지금까지 금과옥조였던 금빛 대신 청동 불상에 흰색의 무광 폴리우레탄 재료를 칠했습니다.
 
조각 작품을 닮은 주불 등 5개의 불상에서는 어떠한 위압적인 권위를 느낄 수 없습니다.
석가모니불 양 옆의 문수, 보현, 관음, 지장 보살은 각각 아이돌 남녀 가수, 친근한 아줌마 아저씨의 얼굴을 형상화했습니다.
두상을 지나치게 크게 만들었던 기존의 불상과 달리 인체 비례도 균형을 잡았습니다.
  
 
 
 
 
진종사가 다시 역사의 기록에 등장한 것은 고려 고종 46년 때인 1259년이었고 이때 고종은 삼랑성 안에 가궐(假闕)을 지었습니다.
이보다 앞선 1232년, 고려 왕실에서는 몽골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강화도로 임시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지은 바 있습니다.
전등사 경내에 가궐을 지은 것은 풍수지리설과 더불어 임금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습니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종 46년(1259년), 임금이 삼랑성 안에 가궐을 짓도록 명했다.”는 사실과 함께
5년 뒤인 원종 5년(1264년), “임금이 대불정오성도량을 열어 4개월 동안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서 대불정오성도량이라 함은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의 온갖 재난을 물리치게 하는, 불교 행사를 말합니다.
원종 임금이 진종사에서 이런 행사를 갖게 한 것은 당시 진종사의 사세(寺勢)가 크게 중흥되었음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강설당
 
강설당은 스님들이 경전을 공부하던 건물이다. 한때 강설당은 전등사 승가대학 건물로 쓰였으나 지금은 복원되어 불교대학과정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대조루
 
전등사의 남동쪽으로는 멀찌감치 강화해협이 내려다 보입니다.
강화해협은 일명 ‘염하’라고도 부르는데 이 염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전등사 대조루입니다.
전등사의 남문이나 동문으로 올라와 두 길이 합치는 지점에 이르면 2층 건물이 보이고 1층 이마에는 ‘전등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지금의 대조루는 1932년에 중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건물 자체가 주변 경관과 잘 어울리며 전등사의 여러 건물 중에서도 아주 소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대조루에서 대웅전을 바라볼 때의 시선은 25도쯤 위쪽으로 향하게 됩니다.
대웅전의 석가모니불을 가장 존경하는 시선으로 보게 하는 각도로, 이런 부분까지 섬세하게 고려해 지어진 건물이 대조루입니다.
대조루에는 1726년 영조 임금이 직접 전등사를 방문해서 썼다는 ‘취향당’이라는 편액을 비롯해 추사가 쓴 ‘다로경권’ 등 많은 편액이 보관되어 있다.
  
 
 
대웅전 내부
 
 
 
고려 때 강화에서 조성된 팔만대장경 역시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호국불교 사상의 결정체였습니다.
조정에서는 대장경을 조성하기 위해 1245년, 선원사를 창건했는데 그 무렵 오랜 역사를 가졌던 진종사가 대장경 조성의 지주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습니다.
  
 
 
대웅전
 
 
 
선전 문구가 이쁘죠.
 
 
 
불교 용품과 기념품 판매점
 
 
 
다양한 소품도 판매합니다.
 
 
 
고려 왕실에서는 삼랑성 안에 가궐을 지은 후 진종사를 크게 중창시켰으며(1266년)
16년이 지난 1282년(충렬왕 8년)에는 왕비인 정화궁주가 진종사에 경전과 옥등을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전등사’라 사찰 명칭을 바꾸었습니다.
이때는 고려 왕실이 개경으로 환도한 뒤였고, 39년 동안 쓰였던 강화 궁궐터는 몽골군에 의해 폐허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삼랑성 안의 전등사는 꾸준하게 사세를 유지해 나갔습니다.
그만큼 고려 왕실이 전등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정족산의 산세가 안온한 명당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풍수가들 역시 ‘마니산이 할아버지산이라면 정족산은 할머니산으로, 신령스러운 기운이 있어 전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는 복지(福地)’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대웅전
 
 
 
종루
 
 
 
대조루
 
 
 
향로전
 
향로전은 법당을 관리하던 사람들이 살던 곳으로 조선 시대에는 상궁이나 나인들이 기도하던 곳으로 쓰이기도 했덩곳으로  지금은 상임법사실로 쓰고 있답니다
 
 
 
명부전 / 약사전
 
 
 
일반적으로 전등이란 ‘불법(佛法)의 등불을 전한다’는 뜻으로, 법맥을 받아 잇는 것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당시 정화궁주는 인기(印奇) 스님으로 하여금 바다 건너 송나라에서 펴낸 대장경을 구해 전등사에 보관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정화궁주의 옥등 설화보다는 송나라에서 전해진 대장경 때문에 전등사로 개칭되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근거가 있습니다.
그 대장경 속에는 <경덕전등록> 등의 불전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전등사 대조루를 중건할 때의 모연문을 보면 ‘육조의 의발을 상수(相授)하는 뜻에서 전등사’로 개칭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처럼 전등사는 고려 왕실에서 각별한 관심을 가진 사찰이었던 만큼 그 후에도 충숙왕, 충혜왕, 충정왕 때에 연이어 중수(重修)되었습니다.
  
 
 
약사전
 
조선 중기의 정면 3칸, 측면 3칸 단층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장대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설치하였으며,
정면 각 기둥 위에는 공포를 배열하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공간포를 설치하였습니다.
내부 천장은 중앙 부분에 우물 천장을 두고 주위에는 빗천장을 만들었으며 거기에 돌아가면서 화려한 연화당초문을 그려 놓았습니다.
   
 
 
약사전 내부
 
 
 
명부전 내부
 
 
 
전등사는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향화(香華)가 그치지 않았던 가람입니다.
여느 고찰과 마찬가지로 전등사도 몇 차례의 화마를 겪었고 조선 광해군 때인 1614년에도 화재로 인해 건물이 모두 소실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지경 스님을 중심으로 한 대중이 재건을 시작해 1621년 2월에는 전등사의 옛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건물의 건축적인 가치는 물론 ‘나부상’으로 더욱 유명한 전등사 대웅전(보물 178호)도 이때 중건되었습니다.
1678년, 조선왕조실록을 전등사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전등사는 왕실종찰로서 더욱 성장했습니다.
 
 
 
조선말기에 전등사는 지형 특성으로 인해 국난을 지키는 요충지 구실을 했습니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조선에 개항을 요구한다는 명목으로 강화도를 공격해 점령했습니다.
이에 맞서 조정에서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양헌수 장군 등을 임명하여 프랑스 함대를 물리치게 했습니다.
이때 양헌수 장군은 휘하 병력을 이끌고 초지진을 건너 정족산성에서 적을 무찔렀습니다.
조선군을 얕잡아보던 프랑스 함대는 이 전투가 끝난 뒤 크게 전의를 상실하여 조선에서 물러갔습니다.
프랑스군은 양헌수 부대와 싸우기 직전만 해도 정족산성을 돌파하고 전등사에서 점심을 먹겠노라 공언한 바 있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조선의 관군뿐만 아니라 경기·황해도 일대의 포수들, 전등사 사부대중들까지 나라의 위기를 구하는 데 힘을 모았습니다.
조정에서는 전투의 승전을 기리기 위해 양헌수 장군 승전비와 비각을 정족산성 동문 내에 세워 백성들의 사기를 키웠습니다.
또한 지금도 전등사 대웅전 내부의 기둥과 벽화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적은 낙서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병인양요 당시 부처님의 가피로 국난을 극복하려는 병사들의 염원이 그렇게 남게 된 것입니다.
 
 
당시 국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대원군은 병인양요 후 전등사에 포량고를 건설하였고
이듬해인 1872년에는 승군 50명과 총섭 1명을 두게 하여 전등사는 다시금 국난 극복의 호국 도량으로 자리매김되었습니다.
 
 
 
전등사는 호국기도 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창건 이래 나라의 역사를 움직였던 인사들이 꾸준하게 찾는 수도권 최고(最古)의 기도 도량으로 손꼽힙니다.
현재 전등사에는 대웅보전, 약사전, 범종 등 보물급 유적을 비롯해 국가사적, 인천시 지정 유형문화재 등 무수한 문화 유적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삼성각 내부
 
 
 
삼성각
 
 
 
요사체
 
 
 
템플스테이  
 
 
땅거미가 내려 않는 저녁 산사가 조용합니다.
 
 
 
오래된 고목이 산사의 경내를 목묵히 지키고 있습니다.
 
 
 
종무소
 
 
 
종각과 뒤로 보이는 극락암
 
 
 
종루
 
 
 
왼쪽 약사전 / 오른쪽 향로전
 
 
 
죽림다원
 
 
 
바위위에 가득한 불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