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드로 성당(St. Peter` Rome)
성 베드로 광장(St. Peter's Square)은 베르니니가 1656년에서 1667년까지 11년에 걸쳐 양쪽 회랑과 같이 세운 것입니다
광장은 그 폭이 246미터, 광장의 입구에서 대성당의 입구까지의 길이가 300여 미터입니다.
전체 회랑에 세워진 원주형 기둥이 284개, 사각으로된 기둥이 각각 네 줄로 88개가 세워져 있습니다,
회랑 바닥에서 천정까지는 그 높이가 16미터 입니다.
천장 위에는 140개의 대리석상이 세워저 있으며 그 당시까지의 성인 그리고 교황들의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고, 석상 하나의 높이는 3.24미터입니다.
거대한 회랑을 광장 양 옆에 나란히 세운 까닭은 대성당은 그리스도의 몸 양쪽 회랑은 그리스도의 양 팔을 상징한것입니다.
베르니니는 양팔을 벌리고 이곳에 오는 모든 이들을 종교나 종족등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집에 초대한다는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것입니다.
베드로 대성당은 처음 완공되던 349년부터 현재까지 세계기독교의 성지순례장소로서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사도 베드로를 비롯하여 초기 로마 교회의 순교자들 무덤이 안치되어 있고,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 성녀가
예루살렘에서 직접 가져온 십자가와 베로니카 성녀의 수건, 그리고 그리스도를 찌른 창들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다는 베드로 대성당의 기원은 콘스탄티누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콘스탄티누스 당시는 황제 난립 시대로 6명의 황제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가 가장 강력했는데, 그들은 312년 10월 28일 로마의 밀비오 다리에서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이 싸움에서 콘스탄티누스는 대천사 미카엘과 가브리엘의 도움으로 기적적인 승리를 합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께 약속했던 일, 즉 승리 후 그의 모친 헬레나 왕후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공경해 오던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무덤 위에 대성당을 건축할 것을 공포합니다.
이렇게 성베드로 대성당은 324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349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의 모친 헬레나 성녀의 봉헌으로 이루어진 이 대성당은 410년 비스고티족의 로마 침략을 시점으로 455년에는 반달족
846년에는 사라센족 그리고 1084년에는 노르만족등 이민족들에게 끊임없이 약탈 당해 그 결과 초대교회의 중요한 보물은 거의 다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15세기 중엽에 들어오면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세운 원래의 대성당은
1100년 역사를 지켜오는 동안 여러 차례에 걸친 수리와 확장 등으로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1503년 교황 율리우스 2세(1503-1513)는 상갈로의 줄리아노에게 대성당의 신축을 위해 전문가로 구성된 건축위원회를 조직하도록 명합니다.
수차례에 걸쳐 새로운 대성당의 설계도를 모집한 결과, 브라만테의 설계도가 채택되었습니다.
그의 첫 번째 설계도에 따르면, 로마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판테온(Panteon)의 돔 형식을 도입하고 있으며,
성전 구조는 그리스식 십자가 모양으로 설계되었습니다.
1506년 4월 18일 교황 율리우스 2세에 의해 초석이 놓이면서 대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공사가 시작된 후 4년간은 4개의 거대한 주 기둥을 받쳐 줄 받침대를 세우는 데 모두 소요되었습니다.
브라만테는 성당 내부에 세울 주 기둥들의 모델을 판테온의 내부에 있던 화려하고 아름다운 기둥을 참조하여 설계하였습니다.
특별히 성당 내부 벽의 기둥 형태는 우아한 도리스식으로 설계함으로써, 단순하고도 거룩한 성전으로서의 모습을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이 설계는 후에 미켈란젤로가 다시 도입하며, 현재의 대성당 중앙 제대를 중심으로 한 왼쪽 윗부분은 첫 번째 설계자였던 브라만테의 설계 구상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1514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서거하고, 새 교황 레오 10세는 브라만테가 죽기 바로 전에 자신의 후계자로 천거한 라파엘로를 대성당 신축 공사의 총감독으로 임명합니다.
그러나 교황 레오 10세는 라파엘로가 건축 설계의 경험이 작고 나이가 어려 그 임무를 수행하기 부족한 것을 알았습니다.
보완책으로 경험이 풍부한 두 건축 설계자를 파견시켰는데, 이들이 바로 상갈로의 줄리아노와 베로나의 조콘도 수사였습니다.
교황은 새로이 구성된 새 성당 건축 책임자인 세 사람에게 앞으로 신축될 대성당이
콘스탄티누스의 기념 성당 구조를 가능한 파괴하지 않도록 하는 범위 내에서 설계하고 공사를 진행하도록 각별히 당부하였습니다.
이 천개야말로 베르니니의 작품중의 걸작중의 걸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황 우르바누스 8세(1568-1644)의 명에 의해 제작된 이것은, 그 위에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거대한 돔과 함께
성베드로 대성당뿐 아니라 이탈리아 전역에서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양대 예술 양식중 최고의 예술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이 천개를 제작하기 위해 필요했던 막대한 양의 청동 금속은 이탈리아에서 모아졌는데, 그 중에서도 베네치아 지방에서 많은 양이 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모아진 금속은 211,427파운드에 달하였고 그런데도 부족하자 기원전 1세기때 신전인 판테온의 내부 천장의 청동을 떼어서 충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비판의 소지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당시의 로마인들은 "이것은 바르바리(야만인이라는 뜻)가 한 게 아니라, 바르베리니(교황의 가문)가 한 일이다."라는 말로써 교황을 비꼬기도 하였습니다.
이 천개를 직접 구상하고 설계한 베르니니는, 후에 자신의 아이디어는 인간의 영혼이 하늘로 올려지는 것에서 착안되었다고 합니다.
내부 중앙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성령의 빛을 내는 모습으로 있고 위쪽에는 네 명의 천사가 화관(花冠)을 하늘로 끌어올리는 모습입니다.
다른 작은 천사들은 삼중관과 열쇠, 칼 그리고 복음을 들고 있는데 삼중관과 열쇠는 사도 베드로를 상징하며 칼과 복음은 사도 바울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브라만테가 그리스식 십자가 형태로 설계했던 성당을 다시 원래의 모습인 라틴형 십자가형태로 바꾸고,
돔의 위치도 사도 베드로의 무덤을 중심으로 하여 세우도록 설계를 수정했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커다란 두 사건으로 인하여 성당공사는 거의 제자리 걸음을 하게 되었는데,
그 첫 번째는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의 주교좌 성당문에 95개의 조문을 내걸고 로마 교황의 교도권에 항의했던 일과,
두 번째는 1527년 란치케네키를 중심으로 한 독일 용병의 로마 침입으로 로마뿐 아니라 이탈리아 전체가 많은 피해를 입은 일입니다.
그 후 1534년 바오로 3세가 교황에 즉위하면서 공사를 재개(再開)하였고.
상갈로의 안토니오를 중심으로, 조수로는 야고보 멜레기노가 임명되었습니다.
1538년까지는 대성당을 받쳐줄 벽면 기둥들을 세우는 데만 주력하였습니다.
앞에 있는 제단이 사도 베드로의 성좌입니다.
로마의 그리스도인 사이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사도 베드로가 로마에 들어와서
선교 활동을 하였을 때 앉았던 나무 의자의 조각들을 모아서 5세기경 의자의 형태를 만들었고 그 위를 흰 상아로 장식하여 전해져 왔다고 합니다.
이것을 교황 알렉산데르 7세(1655-1667)가 베르니니를 시켜 다시 그 위를 청동으로 장식케 했고, 현재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어쨌든 고고학적 또는 과학적으로 사도 베드로가 과연 이 의자에 앉았었느냐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이 의자는 사도 베드로의 무덤을 표시하기위해 그 위에 세웠던 기념비와 함께 내려온 사도의 유물로 그리스도인들이 경배한것은 사실입니다.
청동 의자의 위쪽을 보면 천연 대리석을 얇게 깎아서 마치 유리처럼 보이는
타원형 안의 중심에 비둘기가 자리하고 이 비둘기는 삼위일체의 한 분이신 성령을 의미합니다.
타원형을 잘 살펴보면 열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열두 사도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또한 타원형의 둥근 모습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점은 삼위일체, 즉 3이라는 숫자의 종교적인 의미를 갖기도 합니다.
베드로 성당 공사는 계속 활발히 진행되었고 1546년 8월3일, 공사 감독인 안토니오가 죽기 전까지는 눈에 뛸 정도로 공정이 진척되어 있었습니다.
상갈로의 안토니오가 죽은 후 후계자로 임명된 이가 바로 미켈란젤로였고 당시 그의 나이는 일흔한 살로 고향인 피렌체에서 로마로 이사해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명성은 이미 이탈리아 전체에 나 있었고, 교황 바오로 3세는 그를 공사 총감독으로 임명하면서 '신이 보내 준 사람'이라고까지 격찬하였습니다.
그가 먼저 한 일은 전임자 상갈로의 안토니오가 나무로 만들어 놓은 돔의 조형과 이제까지 있었던 모든 설계도를 자세히 검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미켈란젤로는 그의 전임자 안토니오의 모든 설계를 비판하게 되었습니다.
안토니오의 설계대로라면 불필요한 내부 외부 기둥이 너무 많고, 건축에서 생명인 미적 감각이 고려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의 설계대로 공사를 계속할 경우엔 앞으로 50년 이상은 더 걸려야 했으며, 공사 비용 역시 엄청나게 소요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미켈란젤로는 자기 자신의 이상대로 설계하게 됩니다.
그의 설계에 따르면 대성당의 규모가 다시 축소되고 돔을 중심으로 한 부분에서는 브라만테의 설계도로 되돌아가 대성당의 돔은 나무로 그 모형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안토니오의 설계에 따라 이미 건축된 건물의 3분의 2에 가까운 부분을 허물어 뜨리고
다시 해야 한다는 데서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교황 바오로 3세의 깊은 신뢰와 애정으로 그의 주장이 받아 들여지게 됩니다.
1540년 교황 바오로 3세의 서거로 후원자를 잃게 된 미켈란젤로는 잠시 그를 반대하던 사람들에 의해 곤경에 처하게 되나
새 교황 줄리오3세가 전임 교황의 신축 대공사에 관한 배려로 남은 여생을 베드로 대성당의 신축 공사에 전념할 수 있게 됩니다.
어쨌든, 미켈란젤로의 건축 설계도는 브라만테의 설계, 즉 그리스식 십자가 형태와 아주 가깝게 되어 있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대성당 건축물 중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돔이고 미켈란젤로는
이 돔을 세우기 위해 1557년 탐부로를 세우면서 1558년과 1561년 사이에 나무로 된 돔의 모형을 제작하였습니다.
1564년 2월, 아흔이 다 된 노장 미켈란젤로가 운명하기 직전,
탐부로는 완성되었으며 그 위에 이미 설계를 마치고 모형까지 만들어 놓았던 돔을 세우는 일만 남았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사후(死後), 이 역사적인 대공사는 잠시 어려움에 부딪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1585년, 훗날 도시 계획 전문가라는 별명을 얻게 된 교황 식스투스 5세(1585-1590)가 즉위하면서 공사는 다시 활발하게 진행되어 갔습니다.
미켈란젤로의 후계자였던 자코모 델라 포르타와 그의 조수 도메니코 폰타나의 지휘 감독 아래
600여명의 인부들이 밤낮으로 공사를 계속한 결과 1588년 8월에 시작한지 22개월 만인 1590년 6월 이 거대한 돔은 완공되었습니다.
공사의 지휘 감독이었던 자코모 델라 포르타는 미켈란젤로의 설계 모형 그대로 공사를 진행하였으며, 다만 그 높이를 몇 미터 정도 더 높게 수정하였습니다.
1605년, 교황 바오로 5세(1605-1621)가 새 교황에 오르면서 대성당의 역사는 또 한 번 바뀌게됩니다.
교황 바오로 5세는 이전의 교황 레오 10세가 원했던 것처럼 새로 짓는 대성당이 옛 콘스탄티누스 기념 대성당이 위치해 있던 전 지역을 포괄하여
신축되기를 원했으며, 이에 따라 브라만테와 미켈란젤로의 설계도를 다시 검토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 결과 원래 미켈란젤로의 설계에 의한 성당 크기보다 두배 정도 크게 확장하도록 결정하였고,
1606년 3월 29일 수요일, 이와 같은 결정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던 옛 성당의 골격들은 모두 헐리고 맙니다.
그리하여 대성당의 모습은 다시 라틴형 십자가의 모양으로 변화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한 번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 확장을 위한 새로운 설계도는 카를로 마데르노의 것이 채택하였으나 확장 공사는 순조롭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설계도에 대한 많은 비판이 주변에서 거세게 일었기 때문입니다.
바티칸 시국을 지키는 스위스 용병
루이 16세와 마리 앙뚜아네뜨에게 고용된 스위스 용병들은 프랑스 혁명 일어나 모두 죽게 생긴 상황에서
어차피 다 몰살 당할거 개죽음 당하지 말고 스위스로 돌아 가라 하였으나 스위스 용병들은 돌아가도 상관 없었지만
자기들은 당신을 지키기 위해 고용된 이상 못돌아간다고 하고 끝까지 싸워 786명 전원 전멸당했습니다.
이와 같이 의무를 다하는 스위스 용병들을 신뢰해 바티칸 시국은 스위스 용병만을 채용한다고 합니다.
어쨌든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새로운 설계자 마데르노에 의해 1607년 11월 5일 시공되었고,
1608년 2월 10일에는 대성당의 정면에 사용될 초석이 축성되었으며, 1614년에는 현재의 대성당 정면이 완공되었습니다.
이렇듯 확장된 부분의 내부 설계에서, 마데르노는 전임자 미켈란젤로가 이미 만들어 놓은 설계와 잘 조화될 수 있도록 철저하게 미켈란젤로의 풍으로 설계했습니다.
그 결과, 현재의 대성당에 들어가 보면 어느 한 구석도 조화를 이루지 않은 부분이 없으며, 한 사람의 설계로 이루어진 느낌을 강하게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1629년, 카를로 마데르노가 죽자 그 뒤를 바로크 예술의 대가 잔 로렌조 베르니니가 이으면서, 신축 대공사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제 베르니니가 해야 될 일은 전임자들의 설계를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대성당의 내부를 좀더 아름답게 꾸미는 것입니다.
미켈란젤로의 설계와 마데르노의 설계를 어떻게 잘 조화시키면서 장식을 하느냐에 문제가 달려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성 베드로 성당은 완성 되었고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는 성당이라는 찬사를 듣습니다.
성 베드로 성당 전면입니다.
베드로 광장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는 오벨리스크는 원래는 현재의 대성당 정면을 바라보면서
왼쪽에 있었던 것으로 1세기 때의 로마 황제 가이오와 네로의 경기장 가운데에 장식을 위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초기에 기념 교회를 세우면서 경기장은 모두 없앴으나 탑만은 계속 남겨 두었습니다.
이를 교황 식스투스 5세의 명에 의해 1586년 4월 30일 이전 공사를 시작하여 약 130여 일 후 같은 해인 9월 10일, 현재의 위치에 세우게 되었습니다.
탑의 높이만 해도 25미터로 로마에 있는 오벨리스크 탑들 중 두 번째로 높으며, 무게는 약 300톤이나 됩니다.
이 거대한 탑을 옮기기 위해 그 당시 건축 설계자였던 도메니코 폰타나가 책임자로 선임되었고,
그의 지휘로 900여 명의 인부와, 말 140여 마리 그리고 47대의 권선기를 동원하여 이 어려운 이전 작업을 해냈다고 합니다.
이렇게 옮겨 놓은 오벨리스크 탑 위에 십자가를 올려 놓음으로써 이 탑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상징하게 됐는데,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로마 제국 시절 그리스도교에 첫 박해를 시작했던 네로가 권력의 상징으로 아끼고 좋아했던 이 오벨리스크 탑을 이곳 광장의 중심에 옮겨 놓은 이유는
광장을 장식하거나 해시계로서의 기능을 갖추기 위한 것보다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의 정신을
이곳에 오는 모든 순례자들에게 일깨워 주기 위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광장이 순식간에 사람들로 꽉 찾다가 순식간에 빠저 나갔다를 반복 했습니다.
이곳은 그늘이 있어서 관광객들이 쉬기 좋아 우리도 여기서 잠시 휴식을 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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