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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티나 예배당(Cappella Sistina)
바티칸 궁전의 가장 뒤에 있으며 이곳은 교황 궐위시 새 교황을 선출할 때 추기경들이 모여 선거하는 곳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시스티나 예배당은 1475년에서 1483년 사이에 건축됐습니다.
1473년 교황 식스티스 4세가 교황의 묘로 조성한 것으로 당시 보티첼리 페르지노 등에 의해 양쪽의 벽이 그려졌고,
그후 율리우스 2세의 명에 의해 미켈란젤로가 천정과 나머지 벽화를 그렸습니다.
미켈란젤로는 1508년 5월 작업에 착수하여 4년 5개월 동안 정열과 창작력을 총동원하여 1512년 불후의 대작을 완성한 것입니다.
그가 천정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 무리한 자세를 취했기 때문에 무릎에 물이 고이고 등이 굽었다는 유명한 일화에서 화가의 정열을 느낄 수 있습니다.
15세기에 대리석으로 만든 칸막이 가 성당을 두 부분으로 분리시키고 있는데
제대가 있는 쪽은 종교행사를 위해 성직자들만 출입할 수 있고, 다른 한 쪽은 회의 등 행사 때 이용합니다.
성당의 규모는 길이 40.23m 폭 13.41m 높이 20.73m입니다.
벽화 '최후의 심판'이 정면에 있고 그 왼쪽은 '모세의 일생' 오른쪽은 '그리스도의 일생'이 그리스도와 모세의 일생을 주제로 하여 각각 6개의 벽화로 있습니다.
천정화 '천지창조'는 구약성서의 천지창조 일화를 주제로 '빛과 어둠의 분리' '해와 달의 창조' '물과 땅의 분리'
'아담과 이브의 창조' '원죄와 낙원으로부터 추방' '노아의 제물' '노아의 대홍수' '술취한 노아' 등 9개의 그림이 있습니다.
이는 시대를 초월한 미의 극치를 이룬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미켈란젤로는 천장화 제작 이후 22년 벽화 '최후의 심판'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중앙에는 마리아와 성인들을 거느린 예수 그리스도가 준엄한 심판을 오른쪽에는 죄인들이 지옥으로 떨어져 갑니다.
그리스도의 발 아래 성 바돌로뮤 의 모습은 비참함과 고민의 표정을 짖고 있는 그의 자화상 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최후의 심판은 수많은 등장 인물을 통해 인간적 가치와 인간 존엄성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역시
그 본연의 대상이 인간이어야 한다는 르네상스 정신과 통한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원래 천지장조는 완전 나체로 그려져 있었으나 이 그림의 나체들은 후임 교황 비오4세의 명으로 다니엘레 다 본테라가 손질하여 나체를 가렸습니다.
이 때문에 다니엘레 다 본테라는 '기저귀 화가'란 별명을 얻었다고 합니다.
큰폭의 구름과 천사들에 떠받들려 하늘에 부상하는 하나님이 오른손 끝으로 땅위의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장면이 정적 속의 긴장을 가득 담고 그려져 있습니다.
근래 천장화 '천지창조' 보수 때 원상태로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최후의 심판
최후의 심판 규모는 자그만치 2백 평방의 벽에 391인의 인물이 그려져 있는 그런 것입니다.
이전의 어느 심판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규모와 구상입니다.
한 팔을 들고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군림한 심판자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천상과 지옥의 세계가 함께하는 거대한 공간과 그 속의 군상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위촉한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사망했지만 누구보다 미켈란젤로의 특성을 잘 이해하는
파울러스(Paulus 3세)가 교황이 되고 나서 새로 의뢰하여(1534년), 그는 더 없는 제작에 의욕을 불어 넣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때는 또 개혁적 정신주의자 비토리아(Vittoria Colona)를 사귀게 된 시절이라 행복하던 때이기도 합니다.
당초의 계획은 제단 벽의 이 최후의 심판과 아울러 입구 벽에 장식할 <루치퍼(Luzifer)의 추락>이 들어 있었으나,
다음 제작할 파올리나 예배당 일로 그를 데려가 버려서 완성을 보지 못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