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산행/세계 여행

[품페이] 비운의 도시 Pompeii / 2

여행자솔향 2012. 7. 1. 21:00
 
 
 비운의 도시 Pompeii  

 

 

 

품페이에서 발굴된 유물들 

 

 

 

잠을 자다 최후를 맞이한 미이라 

  

 

 

쪼그려 앉은 채 최후를 맞이한 미이라. 

 

 

 

생활 유물들

 

 

 

업드린 채 최후를 맞이한 미이라 

 

 

 

1,600여년전인 AD 79년 8월 로마제국의 도시 폼페이(Pompeii)는 베수비오(Monte Vesuvio)화산의 폭발로

도시전체와 2만여명의 주민이 화산재에 파묻히고 마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고 맙니다.  

 

 

 

화산이 폭발하기전 폼페이(Pompeii)는 로마제국의 어떤 도시보다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위락시설로

로마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 높은 리조트 도시였고 농업, 상업도 발달해 있었던 부유한 도시 였다고 합니다.

 

 

 

도로에 설치된 공중용 수도랍니다 .

 

 

 

베수비오(Monte Vesuvio) 화산이 폭발하기전 BC 62년에도 폼페이(Pompeii)에는

대지진이 일어나 도시 일부가 파괴되는 등 화산폭발에 대한 여러가지 징후가 나타났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시민들이 힘을 합쳐 도시를 재건해 재모습을 갖추게 되었지만 37년후인 AD 79년에 예상하지도 않았던 베수비오산(Monte Vesuvio)이

대폭발을 하는 바람에 폼페이(Pompeii)는 그만 안타깝게도 화산재에 묻혀 역사속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폼페이(Pompeii)가 화산폭발로 하여 땅속에 묻혀버린후 세월은 흘러갔고  1,600년후 17세기인 1,710년 농부 한 사람이

우물을 파다 우연히 금붙이 장식장을 발견하게 되면서 폼페이(Pompeii)라는 도시를 발굴하게 되는 초석이 되었고 그당시 나폴리 국왕 '샤를르(Charles)'의

왕비 '마리아 크리스티네(Maria Christine)'는 옛 골동품에 관심이 많은 여자였는데 그녀는 왕실 공병부대 지휘관인

'알쿠비에르(Alcubierre)'를 시켜 베수비오스 산(Monte Vesuvio)기슭을 파헤쳤다고 합니다.

 

 

 

이 발굴에서 청동 조각품 몇개를 찾아냈고 12월11일에는 ‘헤르쿨레늄 극장(Herculaneum)’이라고 새겨진 돌을 발견하게 됩니다.

1,748년 4월1일 샤를르 왕의 명령을 받은 '알쿠비에르(Alcubierre)'는 베수비오스산(Monte Vesuvio) 기슭의 또 다른 곳을 파헤치기 시작하게 되었으며

엿새째인 4월6일에 라틴어가 새겨져 있는 돌기둥들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어 눈부신 프레스코 벽화가 그려진 돌벽이 나왔고 4월19일에는 청동제 조각들과 대리석 조각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처음으로  금화를 잔뜩 움켜쥐고

석고처럼 단단히 굳어버린 남자의 시신이 발굴되었고 얼마 뒤 원형 극장을 발견한후 기대했던 보물이 나오지 않자 발굴작업을 중단하였다고 합니다.

 

 

 

1,755년 6월 어느 날 독일의 고고학자 '요한 빙켈만(Johann Winckelmann)'이 옛 로마시대 책들을 뒤적이고 있다가 ‘소 프리니우스의 편지집’을 읽어 내려가던 중

나폴리 국왕이 파헤치고 있는 곳이 바로 로마시대에 사라져버린 폼페이(Pompeii)라는 도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소 프리니우스의 편지집’이라는 책에는 화산이 터졌을 때 '소 프리니우스'가

아버지인 '대 프리니우스'를 따라 폼페이(Pompeii) 시민들을 구하러 간 일들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우여곡절을 거쳐 오늘날의 폼페이(Pompeii) 유적지가 세계의 여행객들에게 공개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발굴작업을 계속 진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발굴된 유적과 유물들만으로도 당시의 폼페이인들의 문화와 예술, 건축수준을 짐작할 수 있기에 충분하며 폼페이(Pompeii)가 로마제국에 편입되면서

로마인들은 폼페이(Pompeii)를 지리적 지형적 특성에 맞게 고쳐나갔음을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 몇가지 예로 돌로 포장된 도로에 하수로를 설치했으며 그때문에 보행자 도로를 조금 높게 올렸고 

포룸과 원형극장에는 보행자들을 위한 특별 구역으로 지정해 교통소통을 원할하게 통제했던 것으로 유추되고 있습니다. 

 

 

 

폼페이(Pompeii)는 9개의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시로 들어가는 관문 근처에는 여관과 마굿간과 병원이 이었고,

시내 중심 거리에는 선술집과 현재의 패스트푸드점과 같은 카페들이 다양하게 자리하여 편안한 휴식과 환락을 즐기는 문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카페들은 로마인들이 공중 목욕탕에서 목욕을 마친후 간단한 먹을거리를 얻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음식을 만드는 화로

   

 

 

폼페이(Pompeii) 유적 발굴을 통해 드러난 하수시설, 목욕탕, 시장, 극장, 원형 경기장, 음식점 등

각종 시설은 2,0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시설과 비교해 결코 떨어진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기만 합니다.

 

 

 

곡식을 빻는 기구

 

 

 

 

 

 

 

 

 

 

 

 

 

 

 

 

 

 

 

 

 

 

 

 

 

제사를 지내는곳인듯...

 

 

 

좌우로 공동묘지입니다.

 

 

 

규모도 제법 큽니다.

 

 

 

크기로 보아 귀족의 묘인듯~~~

 

 

 

우리 살아있는 동안 다시는 그런 슬픈일들이 벌어지지 말아야 할 비극의 땅 이탈리아 '폼페이(Pompeii)' 폐허가 되어버린 그 잊혀진 도시의 중심에 망연자실 내가 서있다.

저멀리 '폼페이'시민들을 한순간에 화산재로 덮어버린 원망스러운 '베수비오(Vesuvio)'산을 바라다 보며...

 

 

 

황제의 별장입니다.

 

 

 

황제의 별장에 대해 알려면 가이드의 설명이 피요하죠.

 

 

 

방들이 제법 큽니다.

 

 

 

치장이 잘되있습니다.

 

 

 

아늑하기도 합니다.

 

 

 

오랜 세월에도 원형은 그대로네요.

 

 

 

황제의 별장답게 든든하게 설계됬습니다.

 

 

 

해자에 왼 항아릴까요?

 

 

 

황제의 호사로움이 보이는것 같습니다.

 

 

 

황제의 별장답게 외부인의 접근을 막기위해 해자가 설치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