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기념탑공원
1950년 9월 15일 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에서 개시한 상륙작전으로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초기의 수세를 벗어나 반격을 시작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950년 전쟁이 발발한 이후 조선 인민군은 빠르게 남진을 계속했지만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선은 낙동강에서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인천상륙작전 계획은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맥아더(MacArthur,D.S.) 원수가 전쟁 직후 한강에 이르러 전선을 시찰할 때 구상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는 미 지상군을 수원 부근에 신속히 투입하여 북한 공산군의 주력 부대를
그곳에 머물게 하는 한편 인천 부근에 미 제1기병사단을 상륙시켜 공산군 주력 부대의 배후를 공격하려 하였습니다.
그는 유엔군 총사령부의 참모진 중에서 필요한 인원을 뽑아 합동작전기획단을 따로 편성하여 이 기구로 하여금
그 구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하였고 합동작전기획단은 인천·군산·주문진 세 군데에서 상륙하기 위한 계획을 마련하였습니다.
세 가지 대안 중 주요 작전계획을 확정하기 위한 최종 검토과정에서 유엔군 총사령부의 상부기관인 미합동참모본부는
인천상륙은 큰 모험이라고 하면서 작전하기에 훨씬 안전하고 또 성과가 확실시되는 군산으로 상륙하라고 누차에 걸처 종용하였습니다.
유엔군 총사령부의 참모진과 해군 및 해병대 장교들 사이의 중론은 인천상륙만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인천은 세 지역 가운데에서 가장 멀고 깊은 곳이어서 작전을 지원하는 데 어려움이 많을 뿐만 아니라, 조수·간만·지형 등 자연조건도 불리한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맥아더 원수는 인천상륙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천상륙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는 바로 그 불리한 점 때문에
공산군도 인천 일대에 대한 방어를 소홀히 할 것이며, 따라서 그 허점을 찔러 기습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또한, 인천은 서울로 들어가는 지름길이어서 유엔군이 한번 경인지구를 장악하게 되면
북한 공산군의 병참선을 끊어 버리는 결과가 될 것이므로, 가장 빠른 시일 안에 가장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미합동참모본부의 수뇌들은 인천상륙에 대한 우려를 떨치지 못하면서도, 현지 야전 지휘관에게 최대한의 작전 재량권을 부여해 주는
미국 군부의 오랜 전통과, 대일전(對日戰)을 승리로 이끈 맥아더 원수에 대한 신망으로 인하여, 그의 계획을 더 이상 만류하지 못하고 승인하였습니다.
이 작전은 아먼드(Almond,E.M.) 소장이 지휘하는 미 제10군단에 의해 수행되었는데, 그 휘하에는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제7보병사단이 주축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백인엽(白仁燁) 대령이 이끄는 국군 제17보병연대가 미 제7보병사단에, 국군 해병 4개 대대가 미제1해병사단에 배속되어 전력을 보강하였습니다.
상륙 부대의 병력은 총 7만여 명에 달하였습니다.
주력 부대의 일부는 이미 9월 초부터 부산 근처에 집결해 있었고, 나머지는 9월 11일 제90기동함대와 함께 일본에서 출발하였습니다.
때를 같이하여 국군해병대는 유엔 해군함대의 지원 포격을 받으며 군산·목포·포항·영덕 등 동서 해안 여러 곳에서 일련의 양동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9월 15일 새벽 2시 함포 지원전대를 포함한 미해군 공격전대가
상륙 부대의 제1진인 미 제5해병연대 3대대와 M26퍼싱전차 1개 소대를 싣고 월미도를 향해 떠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새벽 5시 북한 공산군의 방어진지에 폭격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17척의 상륙용 주정으로 월미도에 도착한 상륙 부대는 상륙을 시작하였습니다.
북한 공산군 해병 제266독립연대 3대대와 제918포병연대 소속 병력 등 400여 명은
처음에는 산발적인 저항을 하기도 했으나 마침내 유엔군의 화력에 압도되어 투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미제5해병연대 3대대의 월미도 일대 녹색해안(Green Beach) 상륙작전은 오전 중에 성공리에 진행되었습니다.
이어 인천항이 만조가 된 오후 5시경부터 유엔 해군과 공군의 엄호사격이 다시 시작되면서
미 제5해병연대의 2개 대대가 인천항 북반의 적색해안(Red Beach)에, 미 제1해병연대는 인천항 남쪽의 청색해안(Blue Beach)에 각각 상륙하였습니다.
또한, 월미도 맞은편의 황색해안(Yellow Beach)에서는 인천 시가지에 대한 정면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공산군은 서울 위수 제18사단과 인천경비 여단, 그리고 제31여단 예하의 1개 대대 등을 인천 일대에 배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엔군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내륙으로 진입, 9월 16일 밤에는 예정된 교두보를 확보하고 계속해서 경인가도를 따라 서울로 진격할 수 있었습니다.
이곳은 전망이 좋아 기분이 좋습니다.
인천상륙작전기념탑 관람을 마치고 내려오면서 바라본 송도 시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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