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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파산서원(坡山書院)

여행자솔향 2014. 3. 11. 15:38

 

파주 파산서원(坡山書院)

 

 

 

파산서원(坡山書院)은 조선중기 학자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1493∼1564)과 그의 아들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

아우 절효공(節孝公) 성수종(成守琮, 1495∼1579) 및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 1497∼1579)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을 올리며 후학을 양성하던 곳입니다.

 

 

 

파산서원 입구에 도착하니 하마비가 오른쪽 뚝방길에 세워저 있습니다.

 

 

 

선조 1년(1568) 이이(李珥), 백인걸 등 파주 지역 유생들의 주도로 건립되었고 효종 1년(1650)에 사액을 받았습니다.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실시한 서원철폐령 때에도 남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복구하였으나,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되어 1966년 사당만 복원 하였고, 복원에 복원을 거듭해 현제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1568년(선조 1년) 백인걸(白仁傑)·이이(李珥) 등의 관료와 파주 일대 유생의 발의에 의하여 적성현감 청송 성수침(成守琛; 1493∼1563)을 제향하고,

유생의 장수처(藏修處)로 삼기 위하여 설립되었습니다.

 

 

 

성수침은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며, 중종·명종 때 도학과 청절(淸節)로서 이름이 높아

당시 기호사림의 대표적인 존재로 추앙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서원은 선조 초에 있어 기호사림이 중심이 된 서인의 본거지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수침의 아들 성혼(成渾)이 동인(東人)의 미움을 받았기 때문에

1650년(효종 1년) 비로소 파주 유생 백홍우(白弘祐) 등의 청액소(請額疏)를 계기로 사액을 받게 되었습니다.

 

 

 

1628년(인조 6년) 아들 우계 성혼(成渾; 1535∼1598)을 추가 제향하고, 1705년(숙종 31) 휴암 백인걸(1497∼1579)의 위패를

인근 자산서원(紫山書院)으로부터 옮겨와 추가 배향하였으며, 1785년(정조 9) 성수침의 동생 성수종(成守琮; 1495∼1533)을 추가 배향하였습니다.

   

 

 

이 서원은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時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로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습니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후에 복구하였으나,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되어 1966년 사당만 복원하였고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사묘에는 성수침을 주벽(主壁)으로 좌우에 성수종 · 백인걸 · 성혼을 배향하고 있으며, 매년 봄·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사당 주위로는 담장을 돌리고 정면 중앙에 솟을삼문을 두었습니다.

사당은 두벌대의 기단 위에 전돌을 깔고 원형의 초석 위에 원형 기둥을 세웠습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전면(前面)칸은 툇칸이고 각 칸에는 2분합의 띠살문을 달았습니다.

지붕은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이루며 기둥머리는 이익공(二翼工)의 공포형식이고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입니다.

건물의 초석과 기단석 등은 건립 당시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성수침[成守琛, 성종 24년(1493)∼명종 19년(1564)]

 자는 중옥(仲玉), 호는 청송(聽松)·죽우당(竹雨堂)·파산청은(坡山淸隱)·우계한민(牛溪閒民), 본관은 창녕(昌寧), 충달(忠達)의 손자, 대사헌 세순(世純)의 아들입니다.

아우 수종(守琮)과 함께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중종 14년(1519)에 현량과(賢良科)에 천거되었으나,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와

그를 추종하던 많은 사림들이 처형 또는 유배당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청송이라는 편액을 내걸고 두문불출하였습니다. 

 

그의 문하에서 아들 혼(渾)을 비롯한 많은 석학들이 배출되었습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파주의 파산서원과 물계(勿溪)의 세덕사에 제향되었습니다.

  

 

 

성혼[成渾, 중종 30년(1535)∼선조 31년(1598)]

 

 자는 호원(浩原), 호는 묵암(默庵)·우계(牛溪), 본관은 창녕(昌寧), 시호는 문간(文簡), 현감 수침(守琛)의 아들입니다.  

명종 6년(1551)에 생원, 진사에 모두 합격하였으나 복시에 응하지 않고 학문에 전심하였으며 수차례 벼슬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선비들의 교화에 힘썼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삭녕부사, 개성유수의 군중에서 군무를 도왔고 의주 행조에서 우참찬을 지냈습니다.

1597년 비국당상, 좌참찬에 올랐으나 영의정 유성룡과 같이 대일강화를 주장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사직하였습니다.

1598년 지병이 악화되어 파산사당에서 죽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서인의 입장을 대변하였으나 학문적으로는 이황을 지지하여 이이와 4단7정(四端七情) 논쟁을 벌여 유학계의 큰 화제를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파산서원 편액

 

 

 

성수종[成守琮, 연산군 1년(1495)∼중종 28년(1533)]

 자는 숙옥(叔玉), 시호는 절효(節孝), 본관은 창녕(昌寧), 충달(忠達)의 손자, 대사헌 세순(世純)의 아들, 수침(守琛)의 아우입니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중종 14년(151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이때 남곤(南袞)·김구(金絿)·김식(金湜) 및 조광조등이 시관(試官)으로 있었습니다.

문장이 뛰어나고 학문이 깊어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그해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가 물러나자, 그의 문인이라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아 과방(科榜)에서 삭제되었습니다.

그 뒤 다시 과거에 응시하여 초시에 여러번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버리고 청빈하게 살았고 기질이 영특하고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19세에 부친상을 당하여서는 3년 동안 시묘를 하면서 자신은 죽을 먹으면서 매일 세번씩 상식(上食)을 올렸다고 합니다.

사후에 직제학에 추증되었고 파주의 파산서원과 물계(勿溪)의 세덕사)에 제향되었습니다.

 

 

 

백인걸[白仁傑, 연산군 3년(1497)∼선조 12년(1579)]

 자는 사위(士偉), 호는 휴암(休菴), 시호는 문경(文敬), 본관은 수원, 왕자사부 익견(益堅)의 아들입니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김안국(金安國)에게서도 학문을 배웠습니다.

송인수(宋麟壽)·유희춘(柳希春)·이이(李珥)·성혼(成渾) 등 당대의 사림계 인물들과 널리 교유하였습니다.

김식(金湜)이 성균관대사성이 되어 새로운 학풍이 일어나게 되자 뜻을 세워 학문에 전심하였으며, 특히 조광조를 존경하여 그의 집 옆에 집을 짓고 사사하였습니다.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비분강개하여 금강산에 들어가 지내다가 돌아와

1531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3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습니다.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파주의 파산서원과 남평의 봉산서원 등에 제향되었습니다.

  

 

 

신위배

 

 

 

신위배

 

 

 

신위배 위치 / 왼쪽 : 절효성수종 선생 / 오른쪽 : 휴암백인걸 선생

 

 

 

신위배 위치 / 왼쪽 : 청송성수침 선생 / 오른쪽 : 우계성흔 선생

 

 

 

향로

 

 

 

 

 

 

 

 

 

파산서원 앞마당은 넓어서 주차하기도 좋습니다.

 

 

 

찰륜당(察倫堂)

 

 

 

찰륜당(察倫堂)은 정면 4, 측면 2칸짜리 팔작지붕 건물로 1977년 개수하였습니다.

 

 

 

 

 

'察倫堂'이라는 편액은 1918년 춘원 이광수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경현단(景賢壇)1807년 유림이 조감, 성문준, 신민일 등을 영모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다음 해에 사액되었습니다.

 

 

 

경현단(景賢壇)

 

 

 

 

 

 

 

신민일(申敏一, 1576~1650)

 

조선의 문신. 자는 공보(功甫), 호는 화당(化堂), 司宰監 僉正(사재감첨정) 신암()의 아들. 成渾(성혼)의 문인. 1

615(광해군 7) 司馬試(사마시)를 거쳐 식년문과丙科(병과)로 급제, 學諭(학유省峴道 察訪(성현도찰방監察(감찰延曙道 察訪(연서도찰방

銀溪道 察訪(은계도찰방)을 역임한 후 사퇴하고, 인조반정(1623) 후 예조정랑이 되고, 1627정묘호란扈從(호종), 江華(강화)에 가서 和議(화의)를 반대했습니다.

掌令(장령司諫(사간) 등을 거쳐, 인조의 아버지를 元宗(원종)으로 追崇(추숭)하려는 의논이 일어나자 반대하다 江界(강계)로 유배, 수년 후에 풀려나왔습니다.

1636병자호란때 남한산성에 왕을 扈從(호종), 강화 후 영남에 내려가 있다가 1640(인조18) 동부승지가 되고, 이어 右承旨(우승지)가 되었습니다.

1650(효종 1) 趙翼時(조익시)에게 천거되어 大司成(대사성)에 올랐습니다.

 

 

 

성문준(成文濬, 1559~1626)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중심(仲深), ()는 영동(永同창랑(滄浪). 좌참찬 혼()의 아들입니다.

1585(선조 18) 사마시에 합격하여 연은전참봉(延恩殿參奉세마를 지냈습니다.

아버지가 무욕(誣辱)을 당하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임천(林泉)에서 14년간 은거하였습니다.

1623년 인조반정 뒤 사포(司圃)를 거쳐, 영동현감을 역임하였습니다.

박학한 학자로서 글씨도 잘 썼습니다.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되었습니다.

저서로는 태극변 太極辨·홍범의 洪範義·창랑집 滄浪集이 있습니다.

 

 

 

조감(趙堪, 1530~1586)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월롱면 능산리에 묘가 있습니다.

자는 극기(克己), 호는 옥천(玉川), 본관은 咸安, 참봉을 지낸 逗堅의 아들입니다.

白仁傑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그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습니다.

1566(명종11) 부친상을 당하여 3년간 여묘살이를 끝낸 뒤 음보로 장수찰방에 임명되었습니다.

1570(선조 3)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이듬해 이번에는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다시 3년간 여묘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뒤 나이든 스승을 모시고자 咸安을 떠나 한양으로 올라왔습니다.

이후 사포서별좌를 거쳐 의금부도사와 평시서직장 등을 차례로 역임하고, 1585년 종부시주부에 이르렀습니다.

학식과 재능을 겸비한 인물이었으며, 당대에 대문장가로 크게 이름을 날렸습니다.

또한 의리를 중히 여겼으며, 재물을 가벼이 여겨 가난한 이를 보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고 합니다.

죽음에 이르러서는 평온한 모습으로 유지를 전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파주의 용주서원에 배향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