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산행/국내 여행

[파주] 화석정(花石亭)

여행자솔향 2014. 1. 31. 09:00
 

 

 

 

파주 화석정(花石亭)

 

 

 

 

이 정자는 율곡 이이가 작시, 연구와 묵상을 하던 곳으로 경기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산100-1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화석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겹처마의 초익공형태로 조선시대 양식을 따른 건물입니다. 
      

 

 

원래 고려 말 대유학자인 길재(吉再의 유지(遺址)였던 자리라고 전해지나 자세한 문헌 기록은 없습니다.

 

 

 

그후 1443년(세종 25) 율곡 이이(李珥)의 5대 조부인 강평공 이명신이 세운 것을

1478년(성종 9) 율곡의 증조부 이의석이 보수하고 몽암(夢庵) 이숙함이 화석정이라 이름지었다고 합니다.

 

 

 

이숙함의 정자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당나라때 재상 이덕유의 별장인 평천장의 기문을 따서 정자 이름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화석정의 현판은 (고)박정희 전대통령의 글씨로 되어 있습니다.

 

 

 

화석정  -   율곡이이

 

林亭秋己晩 騷客意無窮 (임정추기만 소객의무궁) : 숲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어드니, 시인의 시상이 끝이 없구나
遠水連天碧 霜楓向日紅 (원수연천벽 상풍향일홍) : 멀리 보이는 물은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 서리 맞은 단풍은 햇볕을 향해 붉구나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 (산토고륜월 강함만리풍) : 산위에는 둥근달이 떠오르고, 강은 만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었네
塞鴻何處去 聲斷暮雲中 (새홍하처거 성단모운중) : 변방의 기러기는 어디곳으로 날아가는가, 울고가는 소리 저녁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오래되서 그런지 낡고 바래서 글을 읽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 후 이이가 다시 중수하여 여가가 날 때마다 이곳을 찾았고 관직을 물러난 후에는 이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당시 그의 학문에 반한 중국의 칙사 황홍헌이 이곳을 찾아와 시를 읊고 자연을 즐겼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현재의 정자는 1966년 경기도 파주시 유림들이 다시 복원하고

1973년 정부가 실시한 율곡 선생 및 신사임당 유적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단청되고 주위도 정화되었습니다.

 

 

 

파주 임진팔경 안내도

 

 

 

 율곡의 ‘八歲賦詩’ (팔세부시:8살때 지은 시) 

  

 

 

율곡 이이(1536~1584)

 

조산 중기의 대학자이며 경세가이며 아명은 현룡(見龍) 자는 숙헌(淑獻),호는 율곡(栗谷),석담,우재.

본관은 덕수로서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 사이에서 출생했습니다.   

 

1564년 (명종14년) 생원시 식년문과에 장원한 이후

호조,예조,이조좌랑,지평 등을 거쳐 부교리,청주목사,직제학,대사간,대제학,형조판서,우참찬,이조판서 등을 역임했습니다.  

 

선생은 조선 유학계에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 학자로 기호학파를 형성했고

특히 학문을 민생문제에 직결시키는 경세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당쟁의 조정,10만대군의 양성 및 대동법, 사창(社倉) 실시등에 노력하였습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며 문묘와 선조묘정에 배향되었고 자운서원외 전국 20여개 서원,사우에 배향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에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는 대목은 여러 호종했던 신하들의 회상록에서

보통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는 칠흑 같은 밤에 몽진하는 어가(御駕)가 임진강에 이르렀을 때 배는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고

왜군은 뒤를 쫓고 있는 다급한 상황에서 절벽 위에 정자(화석정)에 불을 질러 강 바닥을 낮같이 밝힌 후 겨우 배를 찾아 임금이 도강하였다”는 식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율곡선생은 임진왜란 10년 전에 경연에서 선조 임금에게 10만양병론을 주청했다가 배석했던 당시 득세한 유성용 등 동인들의 반대에 부딪쳐

무산된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율곡선생이 화석정을 중수 할 때 이미 임진왜란을 예견하고 불에 잘 타도록 간 솔로 정자를 지었다”고 말하기도 하는 데

그 진위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아마 율곡선생의 선견지명을 칭송하는 과장된 표현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화석정 바로 아래로는 임진강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성종 9년 중수할 때 정자의 이름을 ‘화석정(花石亭)’이라 짓고, 중건 기문을 쓴 몽암 이숙함은 연안이씨 부사공 5대손 양원공(楊原公) 이숙함(李淑王咸)입니다.  

이숙함의 화석정 중건 기문 서두에 따르면 『나의 문생(文生)이며 전 날 홍주(洪州: 현 홍성)의 원을 지낸바 있는 이후(李侯) 의석(宜碩)이

그의 아우(사촌)이며 또한 나의 동료인 의무(宜茂)씨를 보내서 말하기를 파주 관아 북쪽 10리 쯤에 율곡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나의 조부 강평공(康平公: 지돈영부사를 지낸 李明晨, 율곡선생의 5대조)의 옛 별장이 있고, 별장 북쪽 깎아지른 듯한 봉우리에다 정자를 지어

기화이초(奇花異草)와 진송괴석(珍松怪石)을 많이 심어 놓고 감상하였는데 그 동안 세월이 흘러 퇴폐하고 다만 옛 터만 남았습니다.

의석이 조업(祖業)이 황폐하게 될까 두려워하여 옛 터에 정자를 중건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자네는 정자 이름을 짓고 기문을 써서 더욱 아름답게 하여 주게』하며 작명과 기문을 부탁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숙함은 이의석이 조업이 황폐될까 두려워 정자를 중건하여다는 지극한 마음과 옛 정자에 기화이초와 진송괴석을 많이 심어놓고 감상하였다는 설명에서

중국 고서 찬황공(贊皇公) 이덕유(李德유)의 평천장(平泉莊) 기문(記文)을 머리에 떠 올리고 그 기문 가운데서 ‘화석(花石)’이란 글자를 따서

이름을 ‘화석정(花石亭)’이라 지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수령 560년이 된 보호수 느티나무

 

 

 

 평천장의 기문에서 찬황공이 “평천을 파는 자 나의 자손이 아니며, 꽃 하나 돌 한개라도 남에 주는 자도 아름다운  자재가 아니다”라고 훈계하였지만

후에 평천장의 꽃과 돌이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되었다는 기록을 들면서 화석정을 창건한 강평공이 이러한 훈계를 하지도 않았지만 손자 이의석은 남에게 팔지도

주지도 않았거니와 조선(祖先)의 마음에 들게 중건하여 능히 조업을 이었으니 그 어질기가 찬황공의 자손들과 비교하면 확연히 들어 난다고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문의 말미에 『정자가 황폐해지니 꽃(花)과 돌(石)도 함께 황폐해지고, 정자가 새로워지니 꽃(花)과 돌(石)도 함께 새로워졌습니다.

물(物)은 비록 앎(知)이 없겠으나 서로 만남은 각자 때(인연)가 있는 것이니 어찌 우연이라 하겠습니까.

 

외로운 배에 명월 싣고 청풍에 낚싯줄 드리우는 것은 이후(의석)의 속세를 떠난 그윽한 정취이니

이 다음 이후를 따라 정자에 올라 놀게 되면 다시 이후를 위하여 글을 지으리라』하면서 기문은 끝났습니다.

  

 

 

이 기문 서두에 양원공은 덕수이씨 이의석과 사제관계이고 그의 사촌 이의무와는 문학 동료로서 공에게 기문을 부탁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인것 같습니다.

선조의 친분 때문인지 양원공의 증손 청련공 이후백과 이의석의 증손 율곡선생은 선후배 관계지만 매우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율곡선생이 찬한 석담일기에는 선조8년(1575)에 이후백이 함경도, 김인후가 평안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떠나려 할 때 율곡 이이가 나서 임금에게 고하기를

『이후백과 김인후는 전장(典章: 법과 제도, 문물 등)에 밝고 시무(時務: 당면한 급한 일)에 능하니 조정에 가까이 두어야 합니다』고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비롯하여 이후백이 함경도 관찰사로 나가 선정을 베푼일, 박순의 천거로 형조판서에 기용된 일, 이조판서로 있을 때 좋은 인재를 천거하려고 노력하고 고민한

일과 친족의 청탁을 거절했다는 일, 김효원이 “이후백이 정성에 기용되면 논박하겠다”는 말에 반박한 일 등 이후백을 좋게 평가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화석정은 행정구역상 경기 파주 파평면 율곡리 화석동 뒷동산입니다.

일제가 이 땅을 강점하여 그들의 대륙침략 목적에 맞도록 철도와 도로를 건설하면서

서울에서 평양, 의주에 이르는 길을 문산 ~ 자유의다리 ~ 개성 ~ 해주 ~ 사리원을 거치도록 연결하였지만

조선 시대만 해도 평양에 이르는 가장 빠른 직선 길은 벽제 ~ 파주(이 화석정 앞에서 임진강을 건너) ~ 장단~ 평산을 거쳐 평양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화석정은 옛날에는 한양 ~ 평양의 가장 번화한 길목에 있었던 것입니다.  

 

 

 

화석정 주차장에서 아래 마을을 내려다 보니 허름한 집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 오릅니다.

 

 

 

궁금한건 못참는 솔향이 내려가 봅니다.

 

 

 

아기 자기하게 꾸며 놓았습니다.

 

 

 

김효순 아뜰리에

 

 

 

김효순 아뜰리에라는 간판은 있지만 인기척이 없습니다.

 

 

 

밟지 말라는데 이것은 무엇인가요.

 

 

 

창이 소담스럽습니다.

 

 

 

흙벽이 보는 눈을 편안하게 합니다.

 

 

 

옆에 있는 화석정 가든도 찍어 봅니다.

 

 

 

이쪽에서도 찍어 보았습니다.

 

 

 

처마끝에 달려 있는 작은 종들이 딸랑거립니다.

 

 

 

이모...

 

 

 

저모...

 

 

 

저쪽 벽면

 

 

 

지붕위에 자전거

 

 

 

지붕위에 올려저 있는 자전거... 무슨 의미인가요...??

 

 

 

아이들 장난감 같은 설치물.

 

 

 

이곳의 주인이 설치 예술가인가 봅니다.

 

 

 

호랑이 무늬를 닮은 개가 개지붕 위에서 나를 째려 봅니다.

 

 

 

윗집에 자리 잡은 이동식 주택

  

 

 

화석정을 바라보면 보이는 느티나무들.

 

 

 

화석정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일화가 전합니다. 

 

율곡은 화석정을 고치면서 관솔을 썼고, 이곳에서 默想(묵상)을 할 때면 항상 기름걸레로 기둥과 바닥을 닦도록 하였습니다. 

임진왜란 8년전 나라가 어려울 때 열어보라는 봉서를 남기고 서거하였고 당시엔 그 뜻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임진년(壬辰年) 4월 그믐날, 퍼붓는 비를 맞으며 선조의 몽진(蒙塵) 행렬이 임진강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비바람 때문에 등불을 밝힐 수 없어 어둠으로 지척을 분간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때 도승지 이항복은 율곡의 유언을 떠올리며 화석정에 불을 놓았습니다.

관솔에 기름을 먹여두었기에 억수 같은 비에도 훨훨 타올라 선조는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전합니다. 

 

 

 

율곡의 미래를 내다보는 또 한편의 일화가 있습니다. 

 

이항복에게 ‘슬프지 않은 울음에는 고춧가루 싼 주머니가 좋다.’는 말을 남긴 것이 8년전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하자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는 딱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이여송이 이끄는 4만원군이 도착하였으나 그들은 싸울 의지가 없었습니다.

접사로 나선 이항복은 외교 관례상 감읍하는 표정을 지어야 하나 마음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 때 이항복의 뇌리에는 율곡 선생의 가르침이 전광석화처럼 스쳤습니다.

일부러 고춧가루를 싼 수건을 넣고 가니 저절로 눈물이 났습니다.

상대방의 눈에는 감격해 맞이하는 모습으로 보일 뿐이었습니다.

율곡의 가르침을 뒤늦게 깨달은 회한의 눈물까지 겹쳤으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