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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덕숭산 향운각(香雲閣)

여행자솔향 2014. 1. 7. 17:20

 

 

 

덕숭산 향운각(香雲閣)

 

 

 

 

향운각(香雲閣)에는 만공스님이 조성하신 관음보살입상이 있고 묵언 수행하시는 스님이 정진중인 숲속 한가운데 위치한 암자입니다.

 

 

 

호서의 명산 덕숭산은 예로부터 3성 7현이 나올 명산이라 하였습니다.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가 없는 향운각에 오르려면 오직 두발로 걸어 가야만 오를 수 있는 암자입니다.

  

 

 

숲솔 길을 따라 맑은 공기 마시며 서서히 올라갑니다.

 

 

 

돌계단을 하나씩 오르며 숨이 가빠오고 마음에 쌓인 오욕을 조금씩 떼어 버립니다.

 

 

 

만공선사 (滿空禪師)는 근대의 고승. 여산송씨. 속명은 도암(道巖), 법호는 만공(滿空) 월면은 법명. 전라북도 정읍 출신. 신통(神通)의 아들입니다.

   

 

 

1883년 김제 금산사에서 불상을 처음 보고 크게 감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 출가를 결심하고, 공주 동학사(東鶴寺)로 출가해 진암(眞巖) 문하에서 행자 생활을 하였습니다.

 

 

 

1884년 경허(鏡虛)의 인도로 서산 천장사(天藏寺)로 가서 태허(泰虛)를 은사(恩師)로 경허를 계사(戒師)로 삼아 사미십계(沙彌十戒)를 받고 득도하였습니다.

 

 

 

그뒤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하나는 어디로 돌아 가는가"(萬法歸一一歸何處)라는 화두(話頭)를 가지고 참선에 열중하였습니다.

  

 

 

1895년 아산 봉곡사(鳳谷寺)에서 벽에 범종을 치면서

법계의 본성을 관찰하여야 한다.  모든것은 오직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應觀法界性一切唯心造라는 게송(偈頌)을 읊다가 홀연 깨달았습니다. 

 

 

 

그뒤 공주 마곡사(麻谷寺 토굴에서 보경(普鏡)과 함께 계속 수도하다가 경허로부터

아직 진면목(眞面目)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였으니 조주(趙州)의 무자(無字) 화두를 가지고 다시 참선을 하도록 하라 가르침을 받고 정진하였습니다.

  

 

 

1901년 경허와 헤어져 양산 통도사의 백운암(白雲庵)에 들러 며칠 머무르는 동안 새벽에

원컨대 이 종소리가 법계에 두루 퍼져 칠벽의 어둠이 모두 밝게하소서 願此鐘聲遍法界 鐵圓幽音悉皆明라는 게송을 읊으면서 범종을 소리를 듣고 크게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곧 천장사로 돌아와 법열을 즐기던 중, 1904년 함경북도 갑산으로 가던 길에 천장사에 들른 경허로부터 전법게(傳法偈)를받았습니다.  

   

 

 

1905 예산 덕숭산(德崇山)에 금선대(金仙臺)을 짓고

보임(保任)을 하는 동안 참선을 하려는 수도승들이 찾아와 그 지도를 맡게 되었습니다.

 

 

 

1905년부터 1908년까지 3년 동안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에서의 선(禪) 지도와

1937년을 전후하여 잠시 마곡사의 주지를 맡았던 때를 제외한 대부분의 생애를 덕숭산에 머물렀습니다.

 

 

 

이곳에서 선을 지도 하면서 선불교를 크게 중흥시켜 현대 한국 불교계에 하나의 큰 법맥을 형성하였습니다.

 

 

 

그는 덕숭산 수덕사와 정혜사(定慧寺) 견성암(見性庵 ) 서산 안면도의 간월암(看月庵)등을 크게 중창 하였고

1920년대" 초에는 선학원(禪學院) 설립운동을 하였으며 선승들의 결사(結社) 동시에 경제적 자립을 위한

계(契) 모임의 성격을 지닌 선우공제회운동(禪友共濟會運動)에 지도자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습니다.

  

 

 

마곡사 주지로 있던 1937년, 당시의 조선총독이 각 도지사가 동석한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의

본산 주지회의에 참석하여 한국불교를 일본 불교화하려는 총독부의 종교정책 방침에 정면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그 반대의 요지는 종교가 정치로부터 분리되어야 하는 점과

한국불교가 조선총독부의 종교정책에 의하여 일본 불교로 변질되어 계율이 문란해지고

한국불교의 전통과 종교적 순수성이 훼손된다는 점을 강력히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전 조선총독 미나미(南次郞)는 한국불교를 파괴시켰으므로

분명히 지옥에 떨어질 것이니 이 미나미총독을 우리가 지옥에서 구제하지 않으면 누가 구하겠는가 라고 하였습니다 .

   

 

 

1941년, 서울 선학원에서 개최한 전국 고승법회에 초대되어

설법하고 계율을 올바로 지키고 선을 진작시켜 한국불교의 바른 맥을 이어 가자고 하였습니다.

   

 

 

이론과 사변을 철저히 배제하고 무심(無心)의 태도로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간화선법(看話禪法)을 채택하였고 제자들에게는 항상 조주(趙州)의 무자화두를 참구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아버지는 신통(神通)이고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맏이로 태어났습니다

만공의 어머니가 신령한 용이 구슬을 토하자 황홀한 광명을 발하는 태몽을 꾸고 그를 잉태했다고 합니다.

  

 

 

1883년 13세때 겨울 김제 모악산 금산사에 가서 과세(過歲)하면 오래 산다는 말을 전해들은 부모를 따라 금산사에 갔을때 처음 불상과 스님을 보고 크게 감동하였습니다.

   

 

 

며칠을 절에서 지내고 돌아온 그는 출가해 스님이 될 뜻이 간절하였습니다.

이듬 해 출가하기 위해 몰래 집을 나와 전주 봉서사와 송광사 논산 쌍계사를 거쳐 공주 계룡산 동학사로 출가하여 진암(眞巖)의 문하에서 행자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해 10월 초순 동학사를 찾아온 경허(鏡虛) 선사를 따라 서산 천장사(天藏寺)에 가서

공양주를 보다가  12월 8일 태허(泰虛)를 은사로 경허를 계사로 삼아 사미계를 받고 월면이라는 법명을 받았습니다 .

 

 

 

 만공이 23세 되던 1893년 11월 1일 천장사에 와서 하룻밤 동숙하던 어떤 소년이 던진  

"'모든 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萬法歸一 一歸何處  라는 말이 있는데 사람들이 이것만 알면

생사에 해탈하고 만사에 막히는 것이 없다 하니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라는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못했다 이에 깊이 발심해 이 화두를 들고 열심히 참구하였습니다. 

      

 

 

가끔씩 의심이 절로 일어나 며칠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정진하다 자리를 옮겨 온양 봉곡사(鳳谷寺 ) 가서 더욱 수행에 전력하였습니다. 

  

 

 

 
2년 동안의 정진 끝에 1895년 7월 25일 새벽에 바라보던 벽에 홀연히 일원상(一圓相) 나타나고
 범종을 치면서 

만일 사람이 삼세의 일체 부처님을 요달해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법계의 본성을 관해야 한다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드는 것이라네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라는 화엄경 제1게송을 읊다가 문득 깨달아 일체의 의심덩어리가 무너졌습니다.

  

 

 

 
그 뒤 만공은 공주 마곡사로 옮겨 보경(普鏡 )스님이 지은 토굴에서 밭을 일구면서 1년여 동안 정진을 계속했습니다.
   

 

 

 이듬해인 1896년 7월 15일 무렵 경허가 이 토굴로 방문해

 "아직 진면목에 깊이 들어가지 못했으니 조주(趙州 ) 무(無)자 화두를 가지고 다시 정진하도록 하라"는

가르침을 내리자 이를 따라 더욱 정진하였습니다.

 

 

 

 
이후 1898년 경허를 모시고 서산 도비산 부석사와 부산 범어사의 계명암 등지에서 수행하였습니다.
 

 

  

 
1901년 여름 31세 때 경허와 헤어져 양산 통도사의 백운암에 들러 며칠 머무는 동안

만공은  새벽에 "원컨대 이 종소리가 법계에 두루 퍼져 철벽같은 어둠을 모두 밝히게 하소서"

(願此鐘聲遍法界 鐵圓幽音悉皆明)라는  범종치는 게송을 듣고  두 번째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해 7월말 자신의 본사인 서산 천장사로 돌아와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飢來喫飯) 피곤하면 잠을 자고(困來打眠 ) 홀로 거닐며 자재하는(逍遙自在) 법열을 즐겼습니다.

 

 

 

마침내 1904년 2월 34세 때 그는  함경북도 갑산으로 가던 길에 천장사에 들른 경허로부터 깨달음을 인가 받고 만공이라는 법호와 함께 전법게(傳法偈)를 받았습니다.

 

 

 

 
이후 만공은 한해동안 전국의 선방을 돌며 선지식을 만나 법문을 나누고, 
 1905년 4월에 예산 덕숭산 수덕사 뒤편에 작은 초암을 짓고 금선대(金仙臺) 이름 붙이고 이곳에서 보임(保任) 공부를 했습니다.

  

 

 

 
사방에서 모여 든 스님들이 그에게 설법하기를 간청하자 사양하다 마침내 법좌에 올라 설하고 참선을 하려는 수도승들을 지도했습니다.
 1913년 7월에는 만공스님께서는 사형인 수월스님, 혜월스님과 함께 갑산에 가서 스승 경허선사의 시신을 다비하고 유품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뒤 만공은 덕숭산 수덕사와 정혜사,견성암,서산 안면도의 간월암 등을 크게 중창하고 많은 사부대중을 거느리며 선풍을 드날렸습니다. 
   

 

 

1922년 3월에는 서울 선학원(禪學院)에서 주도한 선승들의 결사(結社)이자

경제적 자립을 위한 모임이었던 선우공제회(禪友共濟會) 창립운동에 지도자의 사람으로 참여하였습니다.  

 그는 선학원에 깊은 관심을 가져 1924년에는 논 6,000여평을 헌납해 재정적 기반을 구축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만공은 1930년 1월부터 약 3년여 동안 금강산 유점사와 마하연사에서 조실(祖室 ) 있으면서

선을 지도 했을 때와 1937년을 전후하여 잠시 마곡사의 주지를 맡았던 때를 제외한 대부분의 생애를 덕숭산에 머물렀습니다. 

  

 

 

덕숭산에서 그는 능인선원(能仁禪院 ) 한국 최초의 비구니 선원인

견성암(見性庵) 열어 선을 지도하면서 선불교를 크게 중흥시켜  근대 한국불교계의 큰 법맥을 형성하였습니다.

 64세 되던 1934년 12월에도 선학원에 논과 밭을 기증하고,선학원이 조직 기반을 확립하기 위해 재단법인 선리참구원으로 개편하자 이사장이 되었습니다. 

 

 

 

이듬해 3월에는 선학원에서 개최한 조선불교 수좌대회에서

조선불교 선종의 종정으로 혜월, 한암과 함께 추대되었고 그해 10월에는 마곡사의 주지가 되었습니다.

  1936년 12월에는 설산(雪山) 최광익(崔光益)에 의뢰해 스승 경허선사의 초상을 그리게 하고 직접 영찬(影贊)을 써서 금선대 진영각에 모셨습니다.
  

 

 

  1942년 여름에는 서산 간월도(看月島)의 간월암을 복원하고 기도했는데 

이때 제자들을 지도하면서 읊은 깨끗한 반야 난초(淸淨般若蘭

 때때로 깨달음의 향기 토하네(時時吐般若)
  사람도 이와 같으면(若人如是解)
  비로자나 부처님이구려(頭頭毘盧師)

라는 게송이 전합니다. 

    

 

 

말년에는 덕숭산 상봉 가까이에 전월사(轉月舍)라는 초암을 짓고 생활을 하였습니다.

만공은 1946년 10월 20일 목욕 단좌한 후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자네와 내가 이제 인연이 다해 이별하게 되었네 그려" 하고는 껄껄 웃고 문득 입적했습니다.  

 나이 75세 법랍 62세였으며 덕숭산에서 다비하여 유골을 모신 부도인 만공탑을 금선대 근처에 세웠습니다.

 

 

 

덕숭산 중턱에 '향운각'이 운치 있게 보입니다.
수덕사에서 덕숭산을 바라 보면 솔향기 가득히 산 전체를 휘감곤 합니다.
 노스님 혼자 정진삼매에 드시는 조그만 토굴 향운각은 산 가운데에 커다란 점이 되어 더욱 운치를 더합니다.
활엽수가 옷을 벗은 향운각엔 소나무만 청정히 남아 운치를 더하고 바로 옆의 관세음보살석조입상은 먼 발치에서 보면 잡목에 가리워 희미한 흔적만 보일 뿐입니다.
 

 

 

눈이 소복히 쌓인 겨울 어느 날
수덕사 대중스님들이 덕숭산을 바라 볼 때 한 스님이 말했습니다.
"주지스님! 향운각 옆 계곡에 잡목이 많아 관음보살이 보이질 않습니다. 간벌하면 보살님이 현신할 수 있으니 그 앞 잡목을 정리하면 않 될까요."
그 스님은 수덕사 밑에서도 훤히 조망할 수 있는 관세음 보살님을 원하였던 것입니다. 수덕사를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환희심을 줄 수 있는 생각이기에 그리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많은 스님들은 참 좋은 생각이라 동의 하였습니다.
그러자 주지스님께서는 한 말씀 하셨습니다.
"관세음 보살님이 현신하시면 좋지.
 

 

 

  그런데 그리 되면 많은 신도들이 예배하고, 또는 볼거리는 되겠지만

그 위에 정혜사가 있으니 정진하시는 선방 수좌 스님들 정진에 방해가 되겠지.
살아 있는 부처가 더 중요한 것이니 그냥 있자고요."
이 말씀에 많은 스님들은 고개를 숙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