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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화성 용주사(龍珠寺)

여행자솔향 2013. 3. 14. 14:00
 
 
 
화성 용주사(龍珠寺)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창건된 갈양사로써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었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폐사되었다가
조선시대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습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부왕에 의해 뒤주에 갇힌 채 8일만에 숨을 거둔 사도세자의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 것 같아

괴로워 하던 정조는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설법을 듣고 이에 크게 감동, 부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세울 것을 결심하면서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를 천하제일의 복지(福地)라 하는 이곳 화산으로 옮겨와 현릉원(뒤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하고, 보경스님을 팔도도화주로 삼아

이곳에 절을 지어 현릉원의 능사로서 비명에 숨진 사도세자의 능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습니다.

 

 
 

낙성식날 저녁에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 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라 불렀습니다.

 

 

 

전국 5규정소(糾正所:승려의 생활을 감독하는 곳) 중의 하나가 되어 승풍을 규정했으며, 팔로도승원(八路都僧院)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제했습니다.

 

 
 
용주사는 수원, 용인, 안양 등 경기도 남부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80여개의 말사, 암자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현재 절의 신도는 약 7천여 세대에 달하며 정기, 비정기적으로 많은 법회가 이루어지고 또 법회를 통해 교화활동을 행하고 있습니다.
 
 
 
홍살문은 왕실의 능, 원, 묘, 궁전 관아 등의 입구에 붉게칠한 기둥을 세우고, 기둥을 연결한 보에 붉은 살을 박은 형태로 세워 경의를 표하는 의미를 지닌 문입니다.
다른 사찰과 달리 용주사에 홍살문이 있었던 이유는 정조대왕께서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용주사를 창건하고
호성전(護聖殿)을 건립하여 아버지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셨기 때문입니다.
 
 
 
 
 
전체높이 4.5m의 이 화강암 5층석탑은 부근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전합니다.
우리 나라 대개의 석탑이 가람의 입구나 법당 앞에 위치하는데 반해 이 석탑은 용주사 가람의 앞쪽에 자리하고 있어 역시 다른 곳에서 이전해 온 것임을 알게 합니다.
 
 
 
 
 
 
 
 
천보루
 
삼문을 지나 절 경내에 들어서면 한 눈에 대규모의 누각이 정면에 나타납니다.
 1790년 절의 창간 당시 지어진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누각인데 도편수는 경상도 영천 은해사(銀海寺) 쾌성(快性)스님이 맡았고,
강원도 삼척영은사(靈隱寺)의 팔정(八定)스님이 단청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특이하게도 천보루의 누각이름이 안쪽에는 차우(此愚) 김찬균(金瓚均)의 글씨로 '홍제루(弘濟樓)'라고 쓰여있습니다.

밖에서는 천보루, 안에서는 홍제루라고 같은 누각의 이름이 두개로 불려집니다.

원래는 천보루였으나 후대에 홍제루라는 별호가 추가되었는데,

그 의미를 굳이 풀이하자면 밖으로는 하늘[天]이 보호[保]하는 곳이고 안으로는 널리 백성을 제도한다[弘濟]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겠습니다.

 

 

 

 

불음각(佛音閣)

 

천보루 왼쪽 앞에 자리한 불음각(佛音閣)에는 커다란 범종 하나가 걸려있는데 네면에 당좌와 비천을 서로 마주보도록 쌍으로 조식하여 넣었습니다.

이 범종은 1985년에 조성 되었는데 그 소리가 영롱하여 국보 제120호인 범종과 비교해 볼 때 그 영험함이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예불 때마다 울리는 종소리의 여운은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중생의 귓가를 씻어내고

부처님의 미소 띤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고귀한 말씀이 되어 혼탁한 하늘을 밝게 울려주고 있습니다.

 

 
 
 
5층석탑
 
5층석탑은 전하는 바에 따르면 1702년에 성정(性淨)스님이 부처님의 진시 사리 2과를 사리병에 담아 석탑에 안치하였다고 합니다.
세존사리탑으로 부르는 높이 4m의 이 탑은 전형적인 5층석탑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데, 1층의 기단위에 5층의 탑신과 옥개석을 차례로 올리고
상륜부에는 노반·복발·양화·보주를 모두 갖추었습니다. 기단의 면석과 탑신에는 우주(隅柱)가 모각되었으며 기단갑석 위에는 옥신고임으로 처리 되었습니다.
 
 

 

 

대웅전

 

사찰내에서 부처님을 모신 건물을 대웅전이라 부르는데 정확한 의미에서 보면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봉안한 곳을 가리킵니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이 계신 곳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를 부를 때 '대영웅 석가모니'라하고 줄여서 '대웅'이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불전(千佛殿)
 
현재 천불전 자리는 과거에 노전(爐殿), 또는 향로전(香爐殿)이라고 불리던 건물이 있던 곳입니다.
이 자리에 최근 3년동안 법당불사를 하여 93년 3월에 건물을 완성하고 천불전(千佛殿)이라 이름 하였습니다.
건물 내부에는 천개의 작은 불상을 봉안하였고 이 천불은 다불사상(多佛思想)에 근거한 것으로 주로 현재의 현겁천불을 이룹니다.
     

   

 
건물 내부의 중앙에는 석가모니, 비로자나 그리고 아미타여래의 삼세불을 봉안하였습니다.
이 삼세불은 대웅전에 모셔진 삼세불과 그 형식을 같이하여 조성한 것으로 머리 한가운데에는 붉은 계주를 넣었습니다.

  

 
 
 
시방칠등각(十方七燈恪)
 
대웅보전과 천불전 사이에 위치하는 전각으로 칠성, 산신, 독성이 탱화로 봉안되어 있습니다.
이 세 신앙은 불교를 신앙하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불 수 없는 독특한 한국적 불교신앙으로 우리는 삼국시대에 불교를 수용하면서
불교이전의 재래 토착신앙을 배척하지 않고 조화롭게 수용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이들 재래신앙이 불교와 용합되면서 북두칠성을 신앙하는 칠성신앙과 스승없이 혼자서 깨우침을 얻는 독성신앙,
그리고 산신신앙이 한국불교의 한 특성을 이루게 됐던 것입니다.
 
 
 
 
 시방칠등각은 세 신을 함께 모신 전각입니다.
그런데 이 전각 이름은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매우 독특합니다.
그 뜻을 보면 시방(十方)이란 동·서·남·북, 동북·동남·서남·서북, 그리고 상·하의 열 곳으로서 무수한 부처님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칠등(七燈)이란 칠성, 즉 북두 칠성을 가리키므로 시방칠등각은 결국 칠성각과 동일한 뜻입니다.
이것은 절의 창건 당시 지금과 같은 시방칠등각이 아니라 칠성각이라는 전각이 있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칠성각의 도편수는 경기도 안성 죽산 칠장사(七長寺)의 설잠(雪岑)스님이었고,
전각내에는 칠성여래사방칠성(七星如來四方七星幀)을 경옥(敬玉)·연홍(演弘)·설순(雪順)스님 등이 제작 봉안하였습니다.
 
 
 
 
 
 
 
 
 
 
 
 
 지장전
 
저승세계를 상징하는 사찰의 건물을 명부전이라 합니다.
  내부에 저승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어서 시왕전이라 하기도 하고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신다고 해서 지장전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용주사에는 지장전이라고 이름하여 지장보살 시왕, 판관 등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지장전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협시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모시고
그 좌우에 명부시왕을 모시며 각 시왕 앞에는 동자상을 안치합니다.
 
 
 
 
 
 
 
 
호성전
 

정조대왕께서는 일반적인 제사 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던 듯 현륭원 옆에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용주사를 창건하고,

대웅보전 옆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제각으로 호성전을 건립하였습니다.

 

호성전은 궁궐형식으로 지은 전각으로서 사도제자의 위패를 모셔두고 매일 새벽, 한낮, 해질녘, 초저녁, 한밤중, 자정 이후 등 여섯 번의 재를 올렸습니다.

이후 호성전에는 정조대왕, 경의황후(혜경궁 홍씨), 효의왕후 김씨(정조의 왕비)를 차례로 모시게 되는데

이때마다 49재(영산재)를 베풀 것은 물론 속절제와 기신제를 올려 극락왕생을 발원하였다.

 

호성전은 용주사 창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후 일반 맞배지붕으로 중건되었다.

  
 
 
호성전 안에 모셔져 있는 사도세자(장조), 혜경궁홍씨(정조대왕 어머니), 정조대왕, 효의황후(왕비) 의 위패
 
 
 
 
 
 
 
 
 
 
 
 
 
 
 
 
 
 
 
 
 
 
삼문
 
마치 양반집 대가 같기도 한 이 건물은 좌우에 줄행랑을 지닌 맞배지붕 양식으로
사도세자 현륭원의 재궁(齋宮)으로 지어진 절이기 때문에 이러한 건축양식을 지닌 것 같습니다.
 
동서의 옆문과 중앙의 대문에 각각 문이 나 있어 삼문이라 부르며 정면 도리 위에는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죽농(竹濃) 안순환(安淳煥)의 글씨로
'龍珠寺'라는 현판이 자리하는데 부드러우면서도 힘있는 글씨가 인상적이며 오른쪽 옆문에는 '中央禪院'의 현판이 세로로 걸려있습니다.
 
삼문의 네 기둥은 상단부는 목재이고 하단부는 석재의 초석인데 유난히 높고 큰 편입니다.
네 기둥에는 '龍珠寺佛'의 네 자를 각각 첫 글자로 한 시구가 주련으로 걸려있는데 역시 안순환의 글씨입니다.

용이 꽃구름속에 서리었다가 여의주를 얻어 조화를 부리더니 절문에 이르러 선을 본받아 부처님 아래에서 중생을 제도한다.
 
이 내용은 정조가 낙성식 전날 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꾼 후 절이름을 용주사라고 하였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삼문 앞에는 화마(火魔)를 물리친다는 석조 해태상 두 마리가 버티고 서있으며,
간결하고 굵게 처리한 조각기법이 해학적으로 나타나 우리 민족의 여유있는 정서를 상징하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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