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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한국 최조 성지 남양성모성지

여행자솔향 2014. 5. 14. 11:44

 

 

한국 최조 성지 남양성모성지

 

 

 

 

남양성모성지는 이름 없이 희생된 이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천주교인들의 순례지입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는 박해의 역사라고 해도 될 만큼, 교회가 창설된 이래로 100여 년 동안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병인박해(1866년)를 비롯한 많은 박해가 있었습니다.

  

 

 

특히, 병인년 대박해 때에는 1만 명을 헤아리는 순교자가 났는데, 당시 교우의 총 수가 2만 3천 여명이었음을 감안해 볼 때 얼마나 잔학한 박해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병인년 대박해 때 남양 도호부에도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끌려와 순교하였습니다.
 

 

 

조선조 당시 남양은 도호부가 있던 곳으로 행정과 사법권을 부여받은 종삼품의 도호부사가 다스렸습니다.

  

 

 

박해 당시, 남양 포교들이 잡아들인 천주교인들 중, 양반 신분인 분들은

한양이나 공주로 이첩이 되어 그곳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지만, 신분이 낮은 분들은 남양부사의 재량에 맡겨졌습니다.

 

 

 

남양 부사는 모진 매질로 배교를 강요하다가 이에 응하지 않는 신자들을 바로 지금의 남양성모성지 자리에서 목매달아 죽였습니다.

  

 

 

치명일기와 증언록에는 남양의 순교자들로 김 필립보와 박 마리아 부부, 정 필립보, 김홍서 토마 네 분의 이름만이 기록되어 전하고 있지만,

다음의 몇 가지 사실들로 미루어 더 많은 신자들이 남양에서 순교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한국 최초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 마카오에서 공부하다가 열병으로 숨진 최방제 프란치스코 신학생이 남양 사람이었습니다.

 

 

 

한국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 베드로의 손자로 1868년, 외국인 주교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국내 인도를

도왔다는 죄로 체포되어 서소문 밖에서 참수 당한 이재의 토마 순교자가 성장한 곳이 남양부의 백학 교우촌이었습니다.

 

 

 

황사영 알렉산델의 전교로 입교하여 주문모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제관득도

남양 구포의 조카 집에서 숨어 지내다가 1801년 5월에 체포되어 1803년에 순교했습니다.

  

 

 

남양 지역내에 있는 백학 교우촌은 앵베르 주교의 의견으로 성당을 짓기 위해 닦았다는 성당터가 오늘까지 보존되어 있으며 여러 곳에 교우들이
살았던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어 1839년 이전 갓등이와 동시대에 교우촌이 형성되었으며, 남양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천주교 전래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상의 사실들로 남양에는 일찍부터 신앙이 전파되었다는 것과, 조선조 당시 이곳에 많은 천주교인들이 살거나 왕래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또한 남양 포졸들이 멀리 충청도에까지 가서 신자들을 붙잡아다

처형했던 것으로 보아 기록에 남아있지는 않지만, 분명 더 많은 순교자들이 남양에서 처형되었을 것입니다.

 

 

 

 

 

 

 

김 필립보와 박 마리아 부부(1812~1868년)

 

김 필립보는 충청도 면천(沔川) 중방리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부친의 반대로 제대로 신앙 생활을 하지 못하다가 훗날 부친이 마음을 돌려 천주교 신앙을 이해하게 되면서 부친과 함께 교리를 배워 영세하게 되었습니다.

장성한 뒤 박 마리아와 혼인한 필립보는 자녀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본분을 잘 지키게 하였으며 복음을 전하는 데도 열심히 노력하였습니다.

본래 성품이 순량한 데다가 신앙 생활에 철저했던 그는 이후 회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신부가 공소를 순방할 때마다 모든 준비들을 직접 하였고, 교우들이 타당하게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미리 준비시키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필립보는 좀더 자유롭게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 가족들을 데리고 경기도 수원 걸매(현 충청남도 아산시 걸매리)로 이주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오매트르(Aumatre, 吳) 신부에 의해 다시 회장으로 임명된 필립보는 한결같이 자신의 본분을 다하였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 (丙寅迫害)가 일어나 교우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자, 필립보는 아내 마리아와 함께 자식들을 데리고 충청도 신창 남방재로 피신하여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1868년에 다시 박해가 성하게 되자, 필립보는 홍주 신리(新里, 현 충청남도 합덕읍 신리)에 살던 사위의 집으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남양(南陽)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그곳으로 들이닥쳐 그를 체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필립보는 아내와 함께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포졸들이 온 것을 알고는

기도를 다 마친 뒤에 스스로 그들 앞으로 나가 자신이 바로 ‘그대들이 찾던 신자’임을 자백하였습니다.

 

 

 

 

 

포졸들은 필립보를 체포하자마자 매질을 하고는, 천주교 신자들과 교회 서적이 있는 곳을 대라고 다그쳤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이렇게 체포되었다고 어찌 천주교를 믿지 않겠는가?

우리를 내시고 기르시며 사후에 심판하실 주님을 마땅히 힘을 다해 공경해야 한다.

책은 지난 박해(즉 병인박해) 때에 모두 불태워 버렸고, 아는 신자 하나 없이 나 혼자 얻어먹고 다니며 살았다."

그러자 포졸들은 필립보에게 수갑을 채운 다음 남양으로 압송하였습니다.

이때 그의 아내 박 마리아는 필립보와 포졸들이 말려도 듣지 않고 "남편을 따라가 함께 죽겠다" 고 하면서 자원하여 따라갔습니다.

이들 부부는 남양 옥에 한 달 정도 갇혀 있으면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신앙을 굽히지 않고 교회 일은 하나도 입 밖에 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868년 8월 3일 부부가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들 부부는 동갑으로 57세였습니다.

 

 

 

 

정 필립보 (? ~ 1867)
 
경기도 용인의 덧옥돌에서 살았는데, 1866년 11월 남양 감영의 포졸에게 붙잡혀 가혹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다음해 1867년 1월에 교수형으로 순교했습니다.
 

 

 

김홍서 토마(1830 ~ 1868)
 
수원 걸매리 사람으로 1868년 남양 감영의 포졸에게 아내와 함께 붙잡혀 남양으로 끌려왔습니다.
아내는 배교하여 풀려났으나, 김홍서 토마는 끝내 배교치 않고 김 필립보 부부와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했습니다.
배교한 아내는 김홍서 토마가 순교하자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렀습니다.
순교자 김홍서 토마의 나이는 38세였습니다.
 

 

 

부부 순교자들의 얼이 서린 곳
 
한국천주교회 내의 유일한 성모성지인 남양에는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가족과 친구들이 함께 걸으며 묵주기도를 바칠 수 있는 20단 야외 돌 묵주기도의 길(약 1km 정도)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많은 순교자들이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며 묵주를 손에 들고 신앙을 증거했던 순교지에서, 비록 시대는 바뀌었지만
순교자들과 같이 묵주를 손에 들고 성모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뜻깊고 은혜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록에 전해지고 있는 남양의 순교자 네 분 중 두 분은 같은 날, 같은 장소, 즉 남양에서 동시에 순교한 부부 순교자들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김 필립보는 아내 박 마리아와 함께 충청도 내포의 사위 집으로 피신해 있다가 기도 중에 붙잡혔는데,
포졸들이 김 필립보만을 붙잡아 오려는데도 박 마리아가 "남편을 따라가 함께 죽겠다. "며 자원하고 나서, 이들 부부는 한 달 정도 남양 옥에
함께 갇혀 있으면서 문초와 형벌을 받다가 1868년 8월 3일, 같은 날에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서로에 대한 굳은 신뢰심을 바탕으로 사랑하며 살다가 주님을 증거하며 죽기까지 몸과 마음이 늘 함께하기를 희망했던 남양 부부 순교자들의
이러한 믿음과 사랑은 이혼율이 급증하고 가정 파괴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까지 대두되고 있는 요즘
신자들에게 자신들의 신앙과 가정을 되돌아보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입니다.
  

 

 

부부가 나란히 순교한 장소를 무엇보다 가정을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성모님께 봉헌하고 성모님께 기도할 수 있는 장소로 가꾸어가고 있다는 것 또한 의미있는 일입니다.
  

 

 

남양성모성지는 이렇게 평화를 위해 그리고 우리 가정을 위해 가족들이
함께 순례하며 묵주알 위에 손을 모으고 기도할 수 있는 가정 기도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성모님은 순교자들의 모후이십니다.

성모님이 아들의 십자가 곁에 서 계셨던 것은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수난과 죽으심에 참여하신 성모님께서는 분명히 피를 흘린 이상으로 고통을 당하셨고, 따라서 모든 순교자의 모후가 되심이 확실합니다.

그러기에 많은 동정녀와 순교자들이 성모님을 본받아 혹독한 고통을 감수, 인내하고 마침내 신앙을 고백하며 성모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과 증언을 보면 당시의 순교자들이

박해의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묵주의 기도를 바치며 성모님께 의탁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느 곳에서보다도 순교지에서 더욱 분명하게 성모님에 대한 신심과 기도를 배울 수 있음에도

그동안 우리나라의 그 어떤 순교지도 순교자들이 그토록 사랑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의탁했던 성모님을 기억하며 순례할 수 있는 곳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1991년 10월 7일, 故 김남수 안젤로 주교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남양 순교지를 성모님께 봉헌하시며, 한국 천주교회 내의 첫 성모성지로 선포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남양 순교지는 순교자들을 기리고 현양함과 동시에 순교자들이 그토록 사랑하고 공경했던 성모님께 대한 신심도 함께 키워갈 뿐아니라,

깊은 사랑과 신뢰로 우리 자신의 고통과 어려움들 또한 성모님께 의탁하며 기도할 수 있는 성모성지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는 박해시기부터 지금까지 성모님에 대한 깊은 신심과 애정을 지녀왔으나

안타깝게도 성모님에 대한 사랑을 기억하며 순례할 수 있는 순례지가 없습니다.

 

 

 

복음에 나타나는 성모님의 삶처럼 소박하고 이름이 없는 무명의 순교자들이 순교하신 순교지이며,

성모님의 품처럼 아늑한 남양 순교지를 한국 천주교회의 성모 순례지로 봉헌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남양’하면 성모님을 기억하며 성모님께 기도하기 위해 찾아오기 바랍니다.

  

 

 

이제부터 남양 순교지는 성모 순례지입니다.

  

 

 

앞으로 자신의 괴로움, 가정의 괴로움, 본당의 어려움, 교구의 어려움이 있을 때 어머니께 바치는 이 땅, 남양에 찾아와 어머니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이 봉헌이 결코 일회적 외부행사로 끝나지 않도록 자주자주 성모님께 자신과 가정을 의탁하고 봉헌해 드리기 위해 이 남양을 찾아와 순례하며

많은 묵주의 기도를 바쳐주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이 땅의 평화를 위하여 성모님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1991년 10월 7일, 남양 순교지를 성모님께 봉헌하며, 김남수(안젤로) 주교>
 

 

 

남양성모성지의 지정은 해외의 이름높은 루르드나 파티마만을 성모성지로 알고 있는 신자들에게
성모성지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갖게 해 주었고 성모성지를 순례하며 기도하고픈 신자들의 소박한 바람을 채워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순교지를 성모성지로 봉헌하게 됨에 따라 순교지만을 순례지로 알고 있는
한국 교회 신자들에게 순례지에 대한 인식의 범위를 확대시켜 주었고 마리아 신심의 발전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수원교구 이정운>
 

 

 

 

 

 

 

 

 

 

 

 

 

 

 

 

 

 

 

 

 

 

 

 

 

 

 

"성모님, 저는 당신께 속하기를 원합니다."
 
꽃과 나무들로 아름답게 가꾸어진 오솔길을 따라 돌 묵주알을 한알 한알 짚어가다 보면,
어느새 20단 묵주기도 길 끝에 서서 두 팔을 벌리고 당신께 다가오는 모든 이들을 안지한 미소로 맞이해 주시는 남양의 성모상 앞에서 걸음을 멈추게 됩니다.
 

 

 

남양 성모상을 만들게 된 계기
 
고(故) 김남수 안젤로 주교님께서 지난 1991년, 남양 순교지를 성모님께 봉헌하시면서
“앞으로 ‘남양’하면 성모님을 기억하며 성모님께 기도하기 위해 찾아오기 바랍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교님의 말씀대로 많은 신자들이 남양에 찾아와 묵주알을 짚고 성모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해 왔지만 남양성모성지를 대표할 수 있는 ‘남양’만의 독특한 성모상이 없다는 것이 늘 안타깝게 생각되었습니다.
 
남양에 모실 성모님 상은 가능하면 한국인의 심성에 다가갈 수 있는 푸근한 이미지의 ‘한국적인’ 성모상이 었으면 하는 마음과 누구나 거부감이 없고
모든 사람들이 ‘우리 엄마다!’ 라고 느낄 수 있을 만큼 친근감이 느껴지는 보편적인 어머니상으로 조각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10년 넘게 고민했습니다.
 
이러한 구상을 가지고 몇몇 조각가들과의 만남을 가진 후, 2002년 8월 조각가 오상일씨와 함께 작업하기로 결정을 하고
수정 작업 끝에 마침내 2003년 5월 3일, 수원교구장 최덕기 바오로 주교님과 신부님들 그리고 화성시 관계자들과
많은 신자들이 모인 가운데 최덕기 주교님의 주례로 남양 성모상을 축성 봉헌하게 되었습니다.
 

 

 

남양 성모상의 모습
 
남양 성모상은 화강암으로 조각되었으며 높이가 3.5m입니다.
 
성모님의 두 팔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이들을 기쁘게 맞이하시려는 듯
열려 있으며 아기 예수님께서 성모님의 옷자락을 꼭 붙들고 성모님께 매달려 계시는 모습입니다.
 
한복을 입은 모습은 아니시지만, 보다 한국적인 느낌을 살리기 위하여 전체적으로 한복이 지닌 아름다운 선을
강조하여 조각하였고 한국적인 여인의 미, 그 중에서도 동양적인 여인의 부드러운 선을 따서 성모 마리아의 얼굴을 아름답게 조각하고자 했습니다.
   

 

 

베일을 쓰지 않으신 머리 모양은 전통적인 한국 여인의 쪽머리 모양을 약간만 변형하여
조각했는데 단아하고 정숙한 옛 어머니들의 머리 모양이 성모님의 이미지와도 잘 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남양 성모상은 그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던 성모님의 이미지를
최대한 유지시키면서 한국적인 여인의 미와 동양적인 부드러운 선을 따서 조각하고자 하였습니다.
   

 

 

주님의 어머니

 

성모님이 주님의 어머니이심을 느끼고, 어린이와 같은 신뢰심으로

성모님을 사랑하고 성모님께 의탁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남양 성모상은 특별히 아기 예수님께서

성모님의 옷자락을 꼭 붙들고 매달려 계시는 모습으로 조각했습니다.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께서는 숨을 거두시며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라는 말씀으로 성모님과 우리 모두를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로 맺어 주셨다.

 

십자가 밑에서 성모님과 모자의 인연으로 맺어진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마음과 모습으로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바라보며 성모님께 매달리며 언제나 성모님의 보호와 사랑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성모님께 대한 특별한 신심과 사랑을 가지고 계셨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성하께서 첸스토하우 검은 마돈나 앞에서 하신 강론 중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이 성모상 앞에서 기도를 바칠 때 자주 ‘나는 당신께 속한 자입니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큰 신뢰심을 지닌 사람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큰 신뢰심은 바로 여기서 배운 것입니다.

 

 교황님께서 기도하셨던 것처럼 남양성모성지를 순례하는 모든 순례자들도 남양 성모상 앞에서

성모님께 매달려 계신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며 ‘성모님 저는 당신께 속하기를 원합니다.’ 라고 기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께 신뢰를 두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든지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께로 나아가도록 도와주실 것이며 인도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비의 여왕이요 어머니이신 성 마리아
 

마리아는 온전히 독특하고 예외적인 방법으로 자비를 알게 되셨고 예외적으로 자비를 체험하셨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 9항) 마리아는 주님의 자비를 각별히 체험하신 인자한 여왕이시니 환난 중에 부르짖는 이들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자비의 여왕’이란 호칭은 복되신 동정녀의 인자하심과 너그러우심과 품위를 찬미하는 것으로

환난과 위험 중에 믿는 마음으로 동정녀를 찾아드는 백성의 구원을 위해 당신 아들에게 끊임없이 간구하시는 마리아를 드러냅니다.

 

하늘에 오르신 예수의 어머니는 지상에 계실 때에 가나의 신랑 신부를 위해서 청하신 것처럼 아들에게 신자들의 요청을 전달하십니다.

모든 이들이 나를 자비의 어머니라고 부르는데, 사실 사람들을 위한 하느님의 자비가 나로 하여금 모든 이들에게 그토록 자비롭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달려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에게 이토록 자비롭고

죄인들을 돕고 싶어 어쩔 줄을 모르는 나에게 달려오지 않고 괴로움을 겪는 자는 영원히 불쌍하고 참으로 불쌍하다 하였습니다. 

 

죄인들을 돕고 싶어 어쩔 줄을 모르시는 자비로우신 성모님께 두려움없이 다가가

자신들의 근심과 걱정, 고통을 말씀드릴 수 있도록 남양 성모상은 자비로우신 어머니의 모습으로 조각되었습니다.

 

남양 성모님은 당신을 찾는 죄인들을 맞이하시는 것처럼 두 팔을 벌리고 계시며,

얼굴 모습은 동양적인 여인이 지니고 있는 부드러운 선으로, 얼굴 전체에 인자하고 자비로운 미소를 띠도록 조각했습니다.

그 부드럽고 인자한 미소 안에서 순례자들은 자비로우신 어머니를 느끼며, 아무런 거리낌과 두려움 없이 어머니께 다가가 기도 드리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랑의 어머니

 

성모님은 하느님과 아들 예수님, 사람들을 아름답게 사랑하셨고, 그리스도의 잉태와 탄생, 죽으심과 부활의 신비에
아름답게 참여하심으로써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깊고 조용하게, 조화있고 충실하게 결합되셨기 때문에 아름다운 사랑의 어머니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러한 성모님의 영신적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하여 남양 성모상은 부드럽고 온유하며
인자하고 자비로운 미소를 띤 아름다운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으며, 특별히 성모님을 꼭 붙들고 계신 예수님의 친밀한 모습을 통하여
성모님과 예수님 사이의 각별하고도 아름다운 사랑이 드러나고 있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이 아름다운 성모님의 모습 앞에서 순례자들은 ‘죄의 더러움을 미워하며 영신적인 아름다움을 사랑하게 되도록’ 하느님께 청합니다.
 

 

 

가난한 동정녀

 

성모님은 가난하게 사시면서도 예수님만으로 충분히 행복하시고 늘 감사하는 생활을 하셨습니다.
성모상의 옷은 깨끗한 느낌을 살려 장식이나 무늬가 들어가지 않은 소박하고 가난한 모습으로 조각했습니다.
당신께 다가오는 모든 사람을 품에 끌어안고자 하시는 성모님의 자비로운 두 팔의 옷소매는 한복의 선을 따서 조각했습니다.
 
남양 성모님께서 가난한 여인의 옷을 입고 계심에도 그 누구보다 고귀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까닭은 성모님의 가장 큰 보물이며, ‘모든 것’이었던 사랑하는 아기 예수님과 함께 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남양성모성지 순례를 마치고 나오면서 순교의 고통과 성모님의 어머니 사랑을 생각해 보는 좋은 여행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