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숭산 견성암(見性庵)
견성암(見性菴)은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선방으로 잘 알려져 있는 곳입니다.
원래는 정혜사 동쪽에 초가로 지어져 있었으나 만공스님의 뜻에 따라 1930년 도흡스님이 창건한 이래 개축을 거듭했다고 전합니다.
1965년 벽초스님에 의해 법당을 인도식 2층 석조 건물로 조성하여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고 서선당 동선당 요사 등의 전각을 건립하여 오늘날에 이르는 가람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청도 운문사, 김천 청암사등 현재 비구니교육을 전담하고 있는 5대 강원(비구니 승가대학 - 불교종단승인)등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선원은 1928년 예산 수덕사 견성암(여승당)에서 시작돼 현재 전국적으로 39곳에서 운영되고 있습니다.
전국 최고 최대의 비구니 강원(비구니 승가대학)은 단연 청도 운문사(약260명)이고,
문경 윤필암. 예산 수덕사 견성암, 오대산 지장암, 울진 불영사, 울산 석남사, 김천 수도암, 서울보문동 보문사 등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인정한 공식 교육기관으로는 동국대(불교학과, 불교대학원)와 중앙승가대학(대학원)이 있습니다.
일제시대 때, 김일엽(1896~1971)이란 신여성이 있었습니다.
이화학당(現 이화여대)출신에 일본 유학파로 `여성해방` `자유연애`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만공스님(1871~1946)을 만난후 돌연 출가했습니다.
만공스님은 그때 수덕사 뒤에 `견성암`이란 비구니 선원을 처음 세웠습니다.
당시로선 엄청난 파격이자 뉴스였습니다.
이후 `수덕사의 여승`이란 유행가가 나오면서 `수덕사 - 비구니절`이란 오해가 생겼다고 합니다.
물론 지금도 견성암에는 70여명의 비구니 스님이 수행중입니다.
세속에서 문필가로, 신여성으로 이름을 떨쳤던 일엽스님(1896~1971)은
38세 때 수덕사 견성암에서 한 소식을 접한 후 25년 동안 산문 밖을 나가지 않았습니다.
비구니로서 엄격한 청규를 지킨 스님으로는 일엽(1896~1971)스님과 원허 인홍스님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자전적 소설인‘청춘을 불사르고’란 책으로도 유명한 일엽스님입니다.
덕숭총림 수덕사의 산내 암자인 견성암은 창건될 때부터 선원으로 출발, 선원 연혁이 곧 사찰 연혁이 된 국내 최초의 비구니 전문 선원입니다.
초가집에서부터 출발해 함석집, 기와집으로 증·개축을 거듭하다 1965년에 이르러 오늘날의 지하 1층, 지상 2층의 인도식 석조 건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견성암이 대표적 비구니 참선도량으로 자리잡게 되는 데는 만공스님과 법희스님, 그리고 일엽스님의 원력이 컸습니다.
만공스님은 28년 선원의 역사라 할 수 있는 방함록의 서문을 써 견성암이 비구니 선원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을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또한 법희, 일엽스님 등 한 획을 그은 비구니 상좌들에게 전법게를 내려 비구니 승가가 발전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국내 비구니 선풍은 비구와 비구니, 출가자와 재가자를 차별하지 않는 만공스님의 너른 품 안에서 출발이 가능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법희스님은 피나는 정진 끝에 16년 만공스님으로부터 전법게를 받았습니다.
이때가 스님의 세속 나이 28세. 이로써 한국 비구니 법맥의 새 장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현재 견성암 입구에 걸려 있는 편액도 만공스님의 친필입니다.
스님이 75년 입적했을 때 당시 한 불교계 신문에는 “만공 큰스님의 지도를 받아 일찍이 소안(心眼)을 열고
한국 최초로 비구니 선맥을 일으켜 덕숭산 수덕사 비구니 총림선원의 원장으로 추대 되었던 법희 비구니 스님이
4월20일 오후 2시 세수 89세로 금생사를 마치자, 전국 비구니 스님들은 ‘전국 비구니장’으로 법희의 장례를 거행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스님이 생전에 만공 문하에서 당대의 쟁쟁한 수좌 금오·춘성스님 등과 마주앉아
서슴없이 법거량을 했다고 전하고 있어 법희스님의 위치가 어느 정도였는지 실감케 하고 있습니다.
법희스님이 비구니 승가의 기초를 닦았다면, 일엽스님은 여성 수행자에 대한 관심이 적었던 당시 상황에서
여성도 뛰어난 수행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어 대중적 관심을 촉발함은 물론 비구니 승가의 외연을 넓히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최초의 여성 유학생, 최초의 여성잡지 ‘신여자’ 주간 등을 거치며 나혜석과 함께 대표적 신여성으로 불렸던 일엽스님(본명 김원주)은
28년 만공스님을 만나 크게 발심한 이후 출가했고, 33년 견성암에 들어온 이후로는 25년간 산문을 나가지 않은 채 수행을 거듭했습니다.
시인이자 수필가였던 그녀는 이광수에게 필력을 인정받아 “한국 문단의 일엽(나뭇잎 하나)이 되라”는 고평을 들었지만
출가 이후 “글 또한 망상의 근원이 된다”며 절필을 했습니다.
그녀의 대표적 저서이자 베스트셀러였던 수필집 ‘청춘을 불사르고’가 나온 것은 62년도 입니다.
“아무래도 청춘을 사르지 못하면 생사를 초월한 영원한 청춘을 얻을 길은 없습니다”는 구절은
오늘 날에도 여전히 구도의 문 앞에서 서성이는 청춘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명문입니다.
일엽스님은 속세에 있을 때 일본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찾아오자 "나를 어머니로 부르지 말고 스님으로 불러라”라고 냉혹하게 대했습니다.
당시 14세였던 아들을 위로해준 사람은 다름 아닌 나혜석이었습니다.
나혜석은 당시 수덕사 입구 수덕여관에 머물며 일엽스님처럼 출가하려 했으나 만공스님이 “스님 될 사람이 아니다”며 받아 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최근 자신의 체험을 책으로 엮은 일엽스님의 아들 일당스님에 의해 알려졌습니다.
유명한 화가인 일당스님은 파란 만장한 생애를 보내다 67세에 불가에 귀의, 어머니의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견성암 경내를 서성이다 보면 비구들의 참선도량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 어떤 지극함과 더불어 결벽에 가까운 구도 의지가 절로 느껴집니다.
그것은 아마도 출가와 수행의 길 위에서 남성보다 몇 배 더 요구받았을 치열한 결단과 각오의 순간들이 경내 곳곳에 순금처럼 박혀 있기 때문일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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