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세재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조령산(鳥嶺山) 마루를 넘는 이 재는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유역을 잇는 영남대로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사회 문화 경제의 유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습니다.
선비의 상
전통사회의 구심점을 이루었던 지성과 인격의 상징입니다.
신길원 현감 충렬비
사헌부 지평을 지낸 신국량의 아들로 45세에 벼슬길에 올라 선조 23년 경인년에 문경현감으로 도임하였고 임진년 4월 27일 문경을 사수하다가 순국하였습니다.
임란 때 지방관으로 순국한 이가 많지 않았기에 나라에서는 좌승지에 증직(贈職)하여 그의 충렬을 기렸으며 숙종 32년(1706) 비를 세워 충절(忠節)을 표창하였습니다.
임란 당시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상주를 거쳐 문경을 침공하자 현감은 피신하지 않고 문경을 사수하다가 중과부적으로 왜적에게 잡혔지만
현감은 항복을 거절하고 관인도 주지 않았다. 왜적이 현감의 몸을 수색하자 관인을 오른손에 쥐고 주지 않으므로 적이 장검으로 목을 쳐서 순국하였습니다.
1706년 3월에 나라에서 비를 세워 충절을 표창하니 비문은 선무랑 전수사간원 정언지제교인 채팽윤이 지었으며 통훈대부전행성균관전적인 남도익이 글씨를 썼습니다.
옛길박물관
문경의 전통막걸리와 오미자관련 음료수
새재(鳥嶺)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옛 문헌에 초점(草岾)이라고도 하여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
또는 하늘재, 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 사이의 「새(사이)재」 새(新)로 된 고개의 「새(新)재」 등의 뜻이라고도 합니다.
임진왜란 뒤에 이곳에 3개(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의 관문(사적 제 147호)을 설치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았습니다.
남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숙종 34년(1708)에 설관 하였으며 영남 제1관 또는 주흘관이라고 합니다.
정면 3칸과 측면 2칸 협문 2개가 있고 팔작(八作)지붕이며 홍예문은 높이가 3.6m, 폭 3.4m, 길이 5.4m이며 대문의 높이는 3.6m, 폭 3.56m, 두께 11㎝입니다.
좌우의 석성은 높이 4.5m, 폭 3.4m, 길이 188m이고, 부속 성벽은 높이가 1~3m, 폭 2~4m입니다.
길이는 동측이 500m, 서측이 400m로 개울물을 흘러 보내는 수구문이 있으며 3개의 관문 중 옛 모습을 가장 잘 지니고 있습니다.
문경세재 오픈 세트장
문경새재 오픈 세트장은 한국방송공사가 2000년 특별기획 대하드라마 제작을 위해 설치한 것으로 문경새재 제1관문 뒤 용사골에 위치해 있습니다.
19,891평의 부지에 궁 2동(고려, 백제), 기와 41동, 초가 40동이 들어서 국내 최초의「고려촌」이며 세계에서 5번째 안에 드는 머우 큰 야외 촬영장입니다.
촬영장을 문경새재에 설치하게 된 동기는 후백제의 왕 견훤의 출생이 문경 가은이며
무엇보다 촬영장 뒤편의 병풍처럼 둘러선 조령산이 고려의 수도 개성의 송악산과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한국방송공사가 세트건립비 29억1천8백만원을 투입하는 등 모두 33억4천8백만원을 투자 하였으며
한국방송공사가 10년간 무상으로 사용 후 문경시에 기증토록 되어 있고 그동안 ‘태조왕건’, ‘제국의 아침’, ‘무인시대’ 등을 촬영하였습니다.
문경세재는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유서 깊은 유적과 설화·민요 등으로 이름 높은 곳입니다.
이 곳에는 나그네의 숙소인 원터, 신구 경상도관찰사가 관인을 주고 받았다는 교귀정터만 남아있는 것을 1999년 중창하였고
옛날에 산불을 막기 위하여 세워진 한글 표석 "산불됴심" 비(지방문화재자료 제226호)가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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