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산행/향교 서원

[안동] 병산서원(屛山書院)

여행자솔향 2012. 10. 9. 11:33
 

 ▣ 병산서원(屛山書院 ) 

    ●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30    T : 054-853-2172

    ● 병산서원(屛山書院 )은 사적 제260호로  하회마을과 함께 꼭 찾아야 할 곳이 바로 병산서원이다 

  

병산서원의 전신은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으로 고려 때부터 사림의 교육기관이었고 1572년에 서애 류성룡 선생이 지금의 병산으로 옮긴 것입니다.
서애가 타계하자 정경세등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613년에 존덕사를 창건해 위패를 봉안했고 1614년 병산서원으로 개칭하였습니다.

 

 

 

 

 

 

 

 

 

 

 

 

 

 

 

병산서원은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1868년(고종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렸을 때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보호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대대적인 보수가 행해졌으며 강당은 1921년에, 사당은 1937년 각각 다시 지어졌다.

매년 3월 중정(中丁:두 번째 丁日)과 9월 중정에 향사례를 지내고 있다.


 

 

 
복례문(復禮門)
 
서원의 정문은 삼문(三門)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병산서원의 솟을삼문은 가운데 칸만 판문(板門)이고, 좌우로는 담장과 구분되는 벽채를 한 칸씩 두고 있다.
‘복례’라는 이름은 논어 <克己復禮爲仁>에서 유래하며 이는 공자의 가르침을 함축한 경구(警句)로서,
‘자기를 낮추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곧 인(仁)이다’는 유학의 자기절제의 정신을 표현해 놓은 것이다.
 
「입교당 중건일기(1921)」에 의하면 서원의 측면인 만대루 동편에 있었던 것을 이건한 것이라 한다.
병산의 험한 형세를 피하고자 했던 풍수원리가 담겨있었다.
 

 

 

만대루(晩對樓)
 
병산서원에서 가장 알려진 건물로서 건축과 조형미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지은 정면 7칸, 측면 2칸의 누각으로 휴식과 강학의 복합공간이다.
팔작기와집에 홑처마로 된 이 웅장한 건물은 인공적인 서원건축과 자연사이의 매개체 역할을 하는데 한국 서원건축의 백미로 꼽힌다.
기둥사이로 보이는 낙동강과 병산은 마치 7폭 병풍을 보는 듯한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

 

 

‘만대’는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 '백제성루(白帝城樓)'의 한 구절인
'취병의만대 백곡회심유(翠屛宜晩對 白谷會深遊)'에서 따온 말이다.
 ‘푸른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수는 늦을 녘 마주 대할만 하고,
흰 바위 골짜기는 여럿 모여 그윽히 즐기기 좋구나’.
 
만대루는 병산서원을 대표하는 매우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입교당(立敎堂)
 
서원의 가장 핵심적인 건물인 강당이다.
원래의 명칭은 숭교당(崇敎堂)이었고 명륜당이라고도 불렸다.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의미이며, 서원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기와집으로 가구는 5량(樑)이다.
강학당을 가운데로 하고 동쪽의 명성재(明誠齋)와 서쪽의 경의재(敬義齋), 세 부분으로 나뉜다.
 
양쪽 방에는 온돌을 들이고 중앙의 강학당은 3칸의 대청으로 개방하였다.
툇마루가 마련된 명성재에는 서원의 원장(院長)이 기거했으며, 서쪽의 경의재는 이른바 교무실에 해당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입교당과 만대루 사이의 마당을 가운데로 하고 동쪽과 서쪽에서 마주하고 있다.
유생들의 기숙사였던 두 건물은 똑같이 크고 작은 2개의 방과 가운데 1칸 마루로 구성되었다.
강당쪽의 작은 방은 학생회장격인 유사(有司)의 독방이거나 서적을 보관하는 장서실이다.
 
2칸 규모의 큰 방은 학생들이 단체로 기거하는 방이었다.
좌고우저(左高右低)의 원리를 쫓아 동재에는 상급생들이, 서재에는 하급생들이 기거하였다.
 

 

 

 

 

 

 

 

 

 

 

 

 

 

 

 

 

 

장판각(藏板閣)
책을 인쇄할 때 쓰이는 목판(冊版)과 유물을 보관하던 곳으로, 입교당 후면 왼쪽으로 비켜서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도리가 없는 구조이며, 습기를 피하기 위해 정면에 모두 판문(板門)을 달았다.
화마(火魔)를 막기 위해서 다른 건물과 거리를 두어 독립적인 공간을 마련하였다.
서원의 명문도를 평가하는 주요 기준 가운데 하나는 바로 판본의 소장량이다.
따라서 책을 발간하는 목판은 서원의 소중한 재산이었다.
 

 

 

 

 

 

신문(神門)
 
서원의 내삼문(內三門)에 해당하며, 향사(享祀) 때에 제관(祭官)들이 출입하였다.
정면 3칸의 솟을삼문으로 사당의 출입문답게 붉은 색칠을 하여 부정한 것의 접근을 막고 있다.
향사례에서 신문 앞의 마당은 중요한 장소가 된다.
집례를 맡은 임원들은 신문 안마당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일반 학생들은 앞마당에서 참관하여야 한다.
 

 

 

 

 

 

전사청(典祀廳)
 
전사청은 사당에 올릴 제수를 준비하는 곳으로 사당과 한 울타리 안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병산서원의 경우에는 전사청과 사당이 각각 독립된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다.
이는 아래쪽에 있는 주소(廚所) 건물과 중심축을 맞춤으로써
전사청으로 올라오는 제수를 마련하는 주소의 작업을 충실히 지휘 감독하기 위함이다.
존덕사의 오른편으로 자리하고 있다.
 

 

 

 

 

 

 

 

 

 

 

 

 

 

 

 

 

 

 

 

 

 

 

 

 

 

 

 

 

 

 

 

 

달팽이 뒷간
서원 밖 주소(廚所) 앞에 있는 화장실이다.
진흙 돌담의 시작 부분이 끝 부분에 가리도록 둥글게 감아 세워 놓았는데, 그 모양새에서 이름을 따왔다.
출입문을 달아 놓지 않아도 안의 사람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배려한 구조이다.
지붕이 따로 없는 이 하늘 열린 '달팽이 뒷간'은 유생들의 뒷바라지를 하던 일꾼들이 사용하던 것이다.
400여년 전 서원건물과 함께 지어졌으며, 옛 기록에는 대나무로 벽을 둘렀다고도 전해진다.
병산서원의 부속건물에 포함되어 사적 제 206호(1977년)로 지정되었다.
2003년 보수 작업이 이루어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