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읍성 동헌(東軒)
해미읍성은 조선 태종 때 왜구를 막기 위해 쌓기 시작해 세종 3년
(1421)에 완성된 것으로 보이며, 높이 5m, 둘레 1.8km로 남북으로 긴 타원형입니다.
우리나라 읍성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었다고 평가받으며 전남 순천의
낙안읍성, 전북 고창의 고창읍성과 더불어 조선 시대 ‘3대 읍성’이라 불립니다.
해미읍성은 조선 초기 충청병마절도사가 근무한 영(사령부)이 자리한 곳입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1579년(선조12) 훈련원 교관으로 부임해 전라도로 전임될 때까지 10개월간 근무했습니다.
남쪽의 정문 격인 진남루에서 동헌으로 가는 길 중간에는 둥근
담장을 두른 옥사(감옥)도 있는데, 이 옥사에 가슴 아픈 사연이 깃들었습니다.
서산과 당진, 보령, 홍성, 예산 등 서해 내륙 지방을 내포 지방이라 일컫는데, 조선 후기 서해 물길을 따라
들어온 한국 천주교가 내포 지방을 중심으로 싹틔웠으며. 19세기 이 지방에는 주민 80%가 천주교 신자였을 정도입니다.
당시 옥사에는 충청도 각지에서 잡힌 천주교 신자로 가득했습니다.
옥사 앞에 커다란 회화나무가 있는데, 나무 가지 끝에 철사를 매달고 신자들의 머리채를 묶어 고문·처형했다고 전합니다.
지금도 이 나무에는 사람을 매단 철사 자국이 있습니다.
신자가 많아 처형하기 힘드니 읍성 밖 해미천 옆에 큰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했다고 합니다.
읍성 인근에 충청 지역 무명 순교자를 기리는 해미순교성지(해미성지성당 일대)가 있습니다.
원형 성당은 무명 순교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어루만지듯 웅장하게 섰습니다.
성당 뒤편 일대는 ‘여숫골’로 불립니다.
처형장으로 끌려가던 신자들이 ‘예수 마리아’를 끊임없이 외쳤는데, 이것이 ‘여수머리’를 거쳐 ‘여숫골’이 됐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