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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덕숭산 소림초당(小林草堂)

여행자솔향 2014. 1. 6. 14:00

 

 

덕숭산 소림초당(小林草堂)

 

 

 

만공(滿空)스님

 

 

 

소림초당은 1920년대 만공(滿空)스님이 “저 곳에 수행처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을 벽초스님이 받들어 지은 것입니다.

 

 

 

수덕사를 지나 본격적으로 산을 오릅니다.

 

 

 

부처님이 산을 오르는 나를 반겨 줍니다.

 

 

 

부처님을 지나 소림초당으로 올라 갑니다.

 

 

 

만공스님은 14살 어린 나이에 한사코 말리는 어머니를 놔두고 도망쳐 삼천리 길을 걸어 중이 되려고 경허선사을 찾아 갑니다.

 

 

 

스승을 찾았던 만공은 경허선사를 만나 어렸을 때부터 깨달음의 길을 밝혀나가 유명한 일화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심즉시불, 즉 마음이 곧 부처임을 확연대오한 우리 불교 중흥의 선지식인이십니다.

 

 

 

수행하는 마음으로 계단을 하나씩 밟고 올라갑니다.

 

 

 

 

 

아직도 곳곳에 눈이 쌓여 있습니다.

  

 

 

 

 

깊은 계곡의 나무들이 나를 반깁니다.

 

 

 

가파른 돌계단을 열심히 오릅니다.

 

 

 

멀리 산중턱에 소림초당이 아스라이 보입니다.

 

 

 

스승 경허스님은 13살에 서산 천장암에 온 만공을 10년이나 부엌데기로 부려 먹기만 할 뿐 화두 하나 주지 않았습니다.

이 무렵 만공은 이른바 ‘타심통’이 열려 사람의 마음을 환하게 알게 돼 사람들의 걱정거리를 풀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경허는 “그것은 술법이지, 도가 아니다”며 신통을 금했습니다.

  

 

 

수월과 혜월같은 사형처럼 도를 깨친 것도 아니요, 신통조차 못 부리게 하니 혈기 왕성한 만공의 가슴이 터지기 일보직전이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천장암에 들른 한 어린 승려가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가 돌아가는 곳은 어디인가)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처음 듣는 화두에 만공은 앞이 캄캄해졌고 이 물음에 꽉 막힌 만공이 천장암을 무작정 빠져나와 찾은 곳이 ‘봉황의 머리’ 형상 아래 지어진 봉곡사였습니다.

 

 

 

봉곡사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진한 지 2년이 지난 1895년 7월25일. 면벽 좌선 중 무념 상태에서 벽이 사라지고 허공법계가 드러나는 체험에 이르렀습니다.

이어 새벽녘에 종성 게송(종을 치면서 읊는 경전) 가운데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마땅히 법계의 성품을 보라.

일체는 오직 마음이 지어낸 것이다)라는 귀절을 외던 중 홀연히 의심 덩어리가 해소됐습니다.

  

 

 

산책 중인 봉곡사의 비구니 주지 묘각 스님 앞쪽의 야트막한 동산에 ‘세계일화’(世界一花: 우주는 한 송이 꽃)라는 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만공 스님이 늘 하던 법어입니다. 1969년 이 절에 온 묘각 스님이 86년 만공 스님을 기려 세운 탑입니다.

‘세계일화’는 만공의 손상좌로 최근 열반한 숭산(만공의 법제자인 고봉 선사의 제자) 선사가 서구에 선을 전하면서 가장 즐겨 쓰던 말이기도 합니다.

 

 

 

소림초당(小林草堂)은 만공스님이 1920년대 중반 덕숭산 산중턱에 지은 암자입니다.

  

 

 

굽은 목재의 자연미 그대로 집을 지어 볏짚이엉을 얹었습니다.

 

 

 

갱진교(更進橋)라는 다리위에는 출입금지라고 쓰여진 기와장이 방문객을 막고 있습니다.

  

 

 

소림초당은 정면3칸 측면2칸 집입니다.

 

 

 

하방과 중방 상인방등 자연목재를 사용했기에 초당의 창호는 그야말로 이색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당의 창호에는 봉창이 있으나 개방되지 않는 곳이라 일반인들은 볼 수가 없습니다.

 

 

 

만공스님 본관은 여산(), 속명은 도암(), 법명은 월면(), 법호는 만공(滿)입니다.

   

 

 

1871년(고종 8) 태인 군내면 상일리 (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에서 출생하였으며, 13세에 출가하였습니다.

 

 

 

충남 서산 천장사에서 태허()를 은사로 모시고, 경허(, 성우 1849~1912)를 계사()로 하여 사미계를 받았습니다.

  

 

 

1895년 온양 봉곡사에서 수행한 후 덕숭산 수덕사와 정혜사 견성암을 거쳐 금강산 유점사()에서 3년을 지냈습니다.

  

 

 

1905년 덕숭산으로 다시 돌아와 참선하며 수행승들을 가르치고, 1914년 서산 간월도리에 간월암이라는 암자를 세웠습니다.
  

 

 

만공스님은 76세의 세수를 마치면서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 날짜까지 어림짐작하게 되어 시봉들던 비구니스님들을 물리치고

고요하게 앉아 있다가 문득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날 목욕재계하고 삭발도 다시금 깨끗이 하고 제자들이 용맹정진하는 요사채와 암자 등에 들러 격려하고

법상을 물려받을 제자에게 잘 지키라 당부하고 그리고 생밤 몇개를 까먹고 당신 자신에게 "참 오래도 함께 살았고 잘 살았으니 이제 우리 이별하세나"

하면서 환한 웃음을 지은 후 침목을 베고 자는 듯 그렇게 열반에 들었다는 만공 큰 스님 이야기를 들으니 참으로 느끼는것이 많이 있습니다. 

 

삶의 고통 죽음의 고통 즉 인간의 참혹한 윤회의 운명을 만공 큰 스님께서 확실히 벗어나셨구나 그렇게 초당의 문지방을 넘듯 간단하게 가볍게

아무런 흔적도 남김없이 고요히 왔다 갈 수도 있는 거구나. 정말 생불이셨구나 하는 생각을 가슴 깊숙이 스며들게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