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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 완주 송광사(松廣寺)

여행자솔향 2014. 6. 14. 05:29

 

 

완주 송광사(松廣寺)

 

 

 

 

송광사는 도의선사가 절터를 찾다가 영천수를 발견하고 터를 잡았는데 그때가 신라 진평왕 5년(583)이었습니다.

  

 

 

그후 경문왕 7년(867)에 구산선문 중 도의국사의 가지산파 제3조인 보조국사 체징(804~880)에 의해서 중창되었습니다.

 

 

 

그 후 폐사가 되어 주춧돌만 가시덤불 속에 남아 있던 것을 고려 보조국사가 이곳을 지나다 大성지임을 아시고 표시를 해두었고,

순천 송광사를 개창한 후 제자들에게 본사를 복원·중창할 것을 부탁한지 수백 년이 지난 조선 광해군 15년(1622:임술)에

웅호, 숭명, 운정, 득신, 홍신 등 보조국사 제자들이 덕림스님을 중창주로 모시고 복원·중창하게 되었습니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올 것을 기원하고 국난으로 돌아가신 일체 영가들의 왕생극락을 발원했던 곳이기도 하며

병자호란 때에 전주사고(왕조실록)를 지키기 위하여 승군 700명이 머무르는 등 민족의 역사적 영욕을 함께했던 호국도량입니다.

 

 

 

또한 석가의 화현이라고 하신 진묵스님께서 1623년(계해년) 대웅전 삼존불 조성시 증명법사로 초청되었으나 부여무량사에서도 동시 초청된 관계로

송광사에는 주장자를 무량사에는 단주를 보내 법력을 나누었는데 주장자가 밤낮으로 꼿꼿이 서서 법상을 물리는 신의함을 나누신 곳이기도 합니다.

 

 

 

일주문은 현재의 위치로부터 3km 남쪽 밖인 나드리(무주, 진안방면 도로 입구)라는 곳에

서있던 것을 1814년(순조14년) 조계교가 있던 곳에 옮겼다가 1944년 해방되기 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합니다.

 

 

 

이 절은 본래 白蓮寺(백련사)라 불렸으며 800동의 당우와 600승려들이 살아 16방사가 즐비하여 16방주(주지)가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가 대단했었습니다.

 

 

 

송광사 역대 큰스님 / 도의선사

 

속성 왕(王). 호 원적(元寂). 법호 명적(明寂). 784년(선덕왕 5)

중국 당나라에 유학, 광부(廣府)의 보단사(寶壇寺)에서 비구계를 받았습니다.

 

강서(江西) 홍주(洪州)의 개원사(開元寺)로 가서 지장(智藏)의 법맥을 이어받고 '도의'로 개명했습니다.
그 후 백장산(百丈山)의 회해(懷海)를 찾아가 법요(法要)을 배우고, 821년(헌덕왕 13)에 귀국하여 설법을 했으나,

 

당시 경교(經敎)만을 숭상하고 무위법(無爲法)을 믿지 않는 풍조를 보고 때가 오지 않았음을 깨닫고,

그 길로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陣田寺)에 들어가 40년 동안 수도하여 제자 염거(廉居)에게 남선(南禪)을 전수하고 죽었습니다.

 

염거의 제자 체증은 전라남도 장흥의 가지산에서 스승에게 전수받은 선(禪)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도의선사는 가지산파(迦智山派)의 개조(開祖)로 일컬어지며 대한불교 조계종의 종조로 추앙받습니다.

 

 

 

송광사 역대 큰스님 / 신라보조 체징스님

 

수양산 백련사 창건 체징 [體澄, 804~880] 속성 김(金). 시호 보조(普照). 탑호 창성. 웅진 출생 어려서 출가하여 화산 권법사(花山勸法師)에게서 배웠습니다.

827년(흥덕왕 2) 가량협산(加良峽山) 보원사(普願寺)에서 구족계를 받고, 설악산(雪嶽山) 억성사(億聖寺)의 염거(廉居) 밑에서 선(禪)을 닦았습니다.

 837년(희강왕 2) 정육(貞育)·허회(虛會) 등과 당나라에 가서 수도하고 840년(문성왕 2) 귀국, 무주(武州:光州) 황학난야(黃壑蘭若)에 있었습니다.

 

 

송광사 역대 큰스님 / 고려보조 국사 지눌

 

고려 중기 승려로 속성은 정씨(鄭氏), 자호는 목우자(牧牛子)입니다.

한국 선종(禪宗)의 중흥조(中興祖)인 지눌은 8세 때 종휘(宗暉)에게 나아가

승려가 된 뒤로 당시의 종파대립적인 교육을 지양하고 모든 이에게서 배운다는 자세로 정진하였습니다.
1182년(명종 12) 승과에 급제하였고, 나주 청량사(淸凉寺), 예천 보문사(普門寺) 등지에서 선(禪)과 교(敎)가 다르지 않음을 깨우쳤습니다.

 

1190년 뜻을 같이하는 이들을 모아 정혜결사를 맺고 취지문을 선포하였습니다.

이 결사운동은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아야 온전한 공부가 됨을 설파한 운동이었습니다.

이에 1197년 왕족·관리 등과 승려 수백 명이 결사에 참가하였습니다.

 

지눌은 다시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 들어가 선정을 닦다가 홀연히 마음을 크게 열었습니다.

1205년(희종 1)에는 송광사(松廣寺)에서 120일 동안 큰 법회를 열었고 그곳에 머무르며 강설·저술을 계속하였으며, 1210년에 법상(法床)에 앉은 채로 입적하였습니다.

 

 

 

송광사 역대 큰스님 / 벽계스님

 

속성은 최씨(崔氏)이고, 법호는 벽계(碧溪)입니다.

정심(淨心)이라고도 하며, 충청도 금산(錦山)에서 태어났습니다.

 

고려 말의 선승(禪僧)인 각운(覺雲)에게 교법을 배웠습니다.

이후 명나라로 유학하여 임제종(臨濟宗) 총통화상(摠統和尙)의 법인(法印)을 전수받았습니다.

 

귀국하여 직지사(直指寺)에서 수도하였으나 연산군이 불교를 억압하자 황악산(黃岳山)에 들어가 수도하였습니다.

그때 찾아온 지엄(智嚴)을 제자로 삼아 선종(禪宗)의 법맥을 전승하였으며, 다시 법준(法俊)을 제자로 삼아 그에게 교종(敎宗)의 법맥을 전하였습니다.

 

 

 

송광사 역대 큰스님 / 벽암 각성대사

 

벽암 각성대사는 조선 중기 승려로 호는 벽암(碧巖), 속성은 김(金), 자는 징원(澄圓)입니다.

 

보은(報恩) 출생 후 10세에 출가하여 화산(華山)의 중 설묵(雪默)에게 사사(師事),

1588년(선조 21) 승려가 되어 정(晶)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내전(內典)을 배웠습니다.


부휴(浮休)를 따라 속리산·가야산·금강산 등에서 정진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 부휴와 함께 해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습니다.

1612년(광해군 4)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있으면서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이 되었고, 19년 경기도 광주(廣州) 청계사(淸溪寺)에서 왕을 모시고 설법했습니다.

24년(인조 2)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쌓을 때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서 승군(僧軍)을 독려하여

3년 만에 완공(完工)하였고 그 공으로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의 호를 받았습니다.


32년(인조 10) 구례(求禮) 화엄사(華嚴寺)를 중수, 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의승(義僧) 3000명을 규합, 항마군(降魔軍)이라 칭하고 남한산성으로 향하였으나 도중에 강화가 성립되자 지리산으로 들어갔습니다.

40년(인조 18) 쌍계사(雙溪寺)로 옮겨 절을 중수하고

규정도총섭(糾正都摠攝)이 되어 무주(茂朱)의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있으면서 사고(史庫)를 보호했습니다.

 

그 후 송광사(松廣寺)의 주지로 선교(禪敎)의 사석(司席)을 지내고, 41년(인조 19) 해인사로 옮겼다가

이듬해 보개산(寶蓋山)으로 가서 대법회(大法會)를 개최, 묘향산에 들어가 강도(講道)한 후 화엄사에서 입적하였습니다.

선교(禪敎) 양종(兩宗)과 백가서(百家書)에 통달하고 초서(草書)·예서(隸書)에 능하였습니다.

속리산 법주사(法住寺)와 구례 화엄사에 비가 있습니다.

 

 

 

 

 

 

 

 

 

 

 

 

 

 

 

 

 

 

 

 

 

 

 

대웅전

 

대웅전은 조선 인조 14년(1636)에 벽암국사가 짓고, 철종 8년(1857)에 제봉선사가 한 번의 공사를 더하여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대웅전에는 석가여래부처님을 주불로 모시고 우측에 아미타부처님, 좌측에 약사 부처님을 각각 소조(흙으로 빚어)로 모셨습니다.

 

 

 

대웅전 현판은 선조의 8번째 아들이며 광해군의 동생인 의창군이 쓴 것입니다.

인조 14년(1636)에 세운 송광사 개창비의 글도 의창군이 썼습니다.

 

1993년 본존불에서는 세 분 부처님의 조성기가 발견되었는데 <조성기>에 의하면 숭정 14년(인조 5년, 1641) 6월 29일 임금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빌고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조속한 환국을 기원하면서 만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각안에 모셔진 부처님으로서는 규모가 매우 큽니다.

대웅전 삼존불 사이 앞 쪽에 있는 나무로 만든 목조삼전패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높이 2.28m로 앞면에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글씨가 있고, 뒷면에는 조선 16대 왕인 인조 때 조성되었다는 제작연대가 밝혀져 있습니다.

다른 2점은 높이가 2.08m로 같으며, 뒷면에 정조 16년(1792)에 수리하였음을 검은 글씨로 적혀 있으며, 왕비와 세자임을 기록한 패입니다.

 

 

 

 

 

종루

 

종루는 종을 달아놓은 열 십자형 2층 누각으로 송광사 도량을 장엄하는 가치가 큽니다.

열심자로 된 종루 중앙칸에 범종을 모시고 동·남·서 3칸에 목어, 운판, 법고를 각각 모셨습니다.

종루의 지붕은 중앙에서 모아지는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고 마루 밑의 기둥들은 모두 원형기둥을 세워놓았습니다.

 

 

 

 

 

 

 

 

 

 

 

 

 

나한전

 

나한전은 나한님(아라한)을 모시는 건물로 송광사는 나한기도를 봉행합니다.

나한기도를 정성으로 수행하면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룩한다고 전해질 정도로 영험합니다.

나한전 내부에는 주불로 석가여래부처를 나무로 조성하여 모시고, 좌우로 16나한과 오백나한, 인왕상, 동자상, 사자상 등을 모셨습니다.
송광사 나한전은 효종 7년(1656) 벽암 각성대사가 송광사를 다시 지을 때 같이 지은 것입니다.

 

 

나한전 내부에는 목조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16나한과 오백나한, 인왕상, 동자상, 사자상을 모시고 있습니다.

 

 

 

삼성각

 

 

 

삼성각

 

 

 

 

 

 

 

 

 

 

 

 

 

 

 

 

 

 

 

 

 

 

 

 

 

 

 

 

 

 

 

 

 

 

 

 

 

 

 

진정으로 마음을 쉬게하고 싶으면 단 하루라도 산사에 머물면서 사찰 음식도 먹고 해야겠지요.

   

 

 

 

 

 

 

 

 

부처의 세계와 속세를 나누는 경계인 일주문을 앞에두고 뒤를 돌아 봅니다.

 

 

 

 

송광사 금강문을 나서면서 또다시 탐욕과 영욕의 속세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