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수산 무량사[無量寺]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로서
신라시대에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창건한 것으로 조선 세조 때 김시습이 세상을 피해 은둔생활을 하다가 죽은 곳으로 유명합니다.
무량사 천왕문(天王門)
왼쪽은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으로 오른손에 용을 움켜쥐고 용의 입에서 빼낸 여의주를 왼손에 쥐고 있습니다.
오른쪽에 지국천왕이 오른손으로 칼을 들고 눈을 부릅뜨고는 동쪽을 뚧어저라 바라보며 위협을 합니다.
무량사 범종각(梵鐘閣)
얕게 네모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4개의 초석을 두어 기둥을 세워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짜올린 익공식입니다.
중앙에는 불전사물의 하나인 범종을 걸어 두었습니다.
무량사 향적당(香積堂)
향적당은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으며 근래에 불사한 것인지 사용된 목재 등이 깨끗하고 반듯합니다.
무량사 석등(石燈, 보물 제 233호)
석등은 절의 탑이나 건물 앞에 세워 부처나 보살의 지혜가 밝다는 것을 나타내는 등입니다.
탑 앞에 등을 밝히면 33천에 다시 태어나 허물이나 번뇌를 벗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무량사 석등은 무량사 법당 앞뜰에 있는 8각 석등으로 불을 밝혀 두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네모난 바닥돌 위로 삼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입니다.
만들어진 시기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 사이인 10세기경으로 추정됩니다.
무량사 오층석탑(五層石塔, 보물 제 185호)
무량사 극락전 앞에 자리하고 있는 웅장한 모습의 5층 석탑입니다.
기단은 다듬은 석재를 층단으로 괴임을 만들고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을 세웠습니다.
탑신은 지붕돌과 몸돌을 한 층으로 하여 5층을 이루고 있습니다.
네 모서리에 있는 몸돌은 지붕돌에 비하여 높이가 낮은 편이나 전체적으로 알맞은 비례를 보이고 있어 우아하면서도 정중한 느낌을 줍니다.
석탑의 부분재료들이 따로 만들어진 점이나 지붕돌이 얇고 넓은 점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는 높이가 점차 줄어드는 모습들은 부여 정림사지오층석탑과 비슷합니다.
백제와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을 조화시켜 만든 고려 전기의 탑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습니다.
해체공사를 할 때 탑신의 1층 몸돌에서 금동제 아미타여래좌상, 지장보살상,
관음보살상의 삼존상이 나왔고, 3층에서는 금동보살상, 5층에서는 사리구(舍利具)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무량사 극락전(無量寺 極樂殿, 보물 제 356호)
이 전각은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흔치 않는 2층 불전으로 무량사의 중심 법당입니다.
극락전은 외관상으로는 2층이지만 내부에서는 아래 위층 구분되지 않고 통으로 트여 있습니다.
인조 11년(1633년)에 중건되었습니다.
무량사 아미타아미타삼존상(보물 제 1565호)을 모시고 있는 극락전은
조선 중기의 양식적 특징을 잘 나타낸 불교 건축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우수한 건축물입니다.
무량사 명부전(冥府殿,문화재자료 제 389호)
무량사 명부전은 1872년 원열화상에 의해 현재의 모습으로 건립되었다고 전하며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어 지장전이라고도 합니다.
그 안에는 지장, 무독귀왕, 도명의 삼존상을 중심으로 시왕, 사자, 판관,인왕, 동자상 등 총 23구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극락전 앞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어 조선후기에 들어와 중요해진 명부전의 위상을 나타내 줍니다.
명부전 내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 무독귀왕 그리고 시왕 등이 모셔져 있습니다.
극락전 기둥에 걸어둔 주련
무량사 우화궁(雨花宮)
김시습은 매월당 말고도 청한자(淸寒子)라는 호를 갖고 있었다지요.
그런데 편액 쓴 분이 풍류 넘치게도 가운데 한(閒) 자를 뒤집어 써놓았습니다.
김시습은 살아 생전에 화장하지 말라고 유언했답니다.
그를 절 옆에 가매장했다가 3년 뒤 장사 지내려고 열어보니 얼굴빛이 산 사람 같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