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산행/사찰 암자

[부여] 만수산 무량사 [無量寺]

여행자솔향 2014. 4. 5. 19:42

 

만수산 무량사[無量寺]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로서

 신라시대에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창건한 것으로 조선 세조 때 김시습이 세상을 피해 은둔생활을 하다가 죽은 곳으로 유명합니다.

  

 

 

무량사 천왕문(天王門)

 

 

 

왼쪽은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으로 오른손에 용을 움켜쥐고 용의 입에서 빼낸 여의주를 왼손에 쥐고 있습니다.

오른쪽은 오른손에 창  왼손에 작은 탑을 든 광목(廣目)천왕은 이름대로 눈을 크게 부릅뜨고서 서쪽을 살핍니다.

 

 

 

왼쪽에 있는 다문천왕은 부처님 도량의 북쪽을 지키면서 항상 부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고 해서 다문(多聞)이라고 합니다.

오른쪽에 지국천왕이 오른손으로 칼을 들고 눈을 부릅뜨고는 동쪽을 뚧어저라 바라보며 위협을 합니다.

  

 

 

무량사 범종각(梵鐘閣) 

 

얕게 네모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4개의 초석을 두어 기둥을 세워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짜올린 익공식입니다.

중앙에는 불전사물의 하나인 범종을 걸어 두었습니다.

 

 

 

무량사 향적당(香積堂) 

 

향적당은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으며 근래에 불사한 것인지 사용된 목재 등이 깨끗하고 반듯합니다.

  

 

 

 

 

 

 

 

 

무량사 석등(石燈, 보물 제 233호)

 

석등은 절의 탑이나 건물 앞에 세워 부처나 보살의 지혜가 밝다는 것을 나타내는 등입니다.

탑 앞에 등을 밝히면 33천에 다시 태어나 허물이나 번뇌를 벗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무량사 석등은 무량사 법당 앞뜰에 있는 8각 석등으로 불을 밝혀 두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네모난 바닥돌 위로 삼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입니다. 

만들어진 시기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 사이인 10세기경으로 추정됩니다.

 

 

 

무량사 오층석탑(五層石塔, 보물 제 185호)

 

무량사 극락전 앞에 자리하고 있는 웅장한 모습의 5층 석탑입니다.

기단은 다듬은 석재를 층단으로 괴임을 만들고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을 세웠습니다.

탑신은 지붕돌과 몸돌을 한 층으로 하여 5층을 이루고 있습니다.

 

네 모서리에 있는 몸돌은 지붕돌에 비하여 높이가 낮은 편이나 전체적으로 알맞은 비례를 보이고 있어 우아하면서도 정중한 느낌을 줍니다.

석탑의 부분재료들이 따로 만들어진 점이나 지붕돌이 얇고 넓은 점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는 높이가 점차 줄어드는 모습들은 부여 정림사지오층석탑과 비슷합니다.

백제와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을 조화시켜 만든 고려 전기의 탑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습니다.

 

해체공사를 할 때 탑신의 1층 몸돌에서 금동제 아미타여래좌상, 지장보살상,

관음보살상의 삼존상이 나왔고, 3층에서는 금동보살상, 5층에서는 사리구(舍利具)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무량사 극락전(無量寺 極樂殿, 보물 제 356호)

 

이 전각은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흔치 않는 2층 불전으로 무량사의 중심 법당입니다.

극락전은 외관상으로는 2층이지만 내부에서는 아래 위층 구분되지 않고 통으로 트여 있습니다.

 인조 11년(1633년)에 중건되었습니다.

 

 

 

무량사 아미타아미타삼존상(보물 제 1565호)을 모시고 있는 극락전은

조선 중기의 양식적 특징을 잘 나타낸 불교 건축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우수한 건축물입니다.

 

 

 

무량사 명부전(冥府殿,문화재자료 제 389호)

 

무량사 명부전은 1872년 원열화상에 의해 현재의 모습으로 건립되었다고 전하며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어 지장전이라고도 합니다.  

그 안에는 지장, 무독귀왕, 도명의 삼존상을 중심으로 시왕, 사자, 판관,인왕, 동자상 등 총 23구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극락전 앞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어 조선후기에 들어와 중요해진 명부전의 위상을 나타내 줍니다.

 

 

 

명부전 내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 무독귀왕 그리고 시왕 등이 모셔져 있습니다.

 

 

 

 

 

 

 

극락전 기둥에 걸어둔 주련

 

 

 

 

 

 

 

 

 

 

 

 

 

무량사 우화궁(雨花宮)

 

 

 

 

 

극락전 뒤편으로 개울을 건너가자 양지바른 산기슭에 대나무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삼성각과  아담한 기와집이 같이 있습니다.
김시습이 살다 입적한 자리에 2007년 그를 기려 세운 승방 겸 객사 청한당입니다.

 

김시습은 매월당 말고도 청한자(淸寒子)라는 호를 갖고 있었다지요.
무량사 스님들은 평생 떠돌며 길에서 살았던 그의 터에 찰 寒 자를 붙여주기 뭐해서 한가할 한(閒) 자로 바꿔 당호를 붙였답니다.

그런데 편액 쓴 분이 풍류 넘치게도 가운데 한(閒) 자를 뒤집어 써놓았습니다. 

  

 

 

김시습은 살아 생전에 화장하지 말라고 유언했답다.

그를 절 옆에 가매장했다가 3년 뒤 장사 지내려고 열어보니 얼굴빛이 산 사람 같았습니다.

승려들이 모두 놀라 '부처'라고 찬탄했고 다비 의식을 치른 후 그 뼈를 모아 승탑을 세웠습니다.

  

 

 

청한당 왼쪽에 삼성각이 있습니다. 

   

 

 

칠성과 산신, 독성을 모신곳으로 무량사 법당 중에 가장 최근인 1937년에 지었습니다.

      

 

 

산신각이라고도 하는 삼성각은 불교가 우리 토속신앙 산신령과 칠성을 받아들여 모신 곳입니다.

 

 

 

정면에 북두칠성을 주재하는 치성광여래와 좌우로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협시한 탱화를 모셨습니다.
 

 

 

 

 

어려서부터 똑똑해서 천재로 이름을 떨친 매월당 시습(1435~1493)은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하던 스물한 살 때 세조가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읽던 책을 불태우고 통곡합니다.

 그는 머리 깎고 설잠이라는 법명의 스님이 돼 방랑깅에 올라 금오산에서 한문소설집 금오신화를 쓰1483년 무량사에 듭니다. 

세조를 조롱하고 그 아래서 영혼 파는 무리들을 꾸짖으며 거침없는 삶을 살았던 그에게도 안식이 필요했겠지요.  

 

 

 

텅빈 전각 안에 김시습의 영정만 놓여 있습니다.
무량사가 지닌 보물 1497호 김시습 초상은 따로 있고 그 사진본입니다.

매월당 김시습의 초상을 모셔둔 전각엔 아루런 편액도 걸려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뛰어난 유학자이기도 했지만 생육신으로서 그의 대부분 생은 승려였지요.
그래서 그의 초상화들은 스님 모습인 것이 많았다가 차츰 이 영정처럼 유학자 모습이 돼 갔다고 합니다.
숭유억불 정책을 폈던 조선시대가 그를 불자보다는 성리학자로 기억하고 싶어 했던 탓이겠지요.
지조와 천재와 광기의 삶을 살다 간 자유인이 주름진 미간 찌푸린 눈썹에
우수 띤 얼굴을 하고서 시선 둘곳을 몰라 합니다.
그리고 만 10년 뒤 쉰아홉 살에 입적합니다.

 

 

 

무량사 원통전(圓通殿) 

  

원통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로 겹치마에 맞배지붕을 올린 주심포 건물입니다.

창호는 빗살창으로 짜 각 4분합의 문을 달았고 앞면에는 1분합의 문을 달아 출입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전까지 천불전이라 불렸는 모양으로 전각 배치도에는 천불전으로 나와 있는데, 편액은 원통전으로 걸려 있습니다.

 

 

 

무량사 영산전(靈山殿, 향토유적 제 70호)

 

영산전은 극락전, 천왕문을 잇는 종축선상과 직교되는 축선상에 자리하고 있는 건물입니다.

  

 

 

영산전에 모셔놓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가섭과 아난, 그리고 나한님들입니다.

 

 

 

영산전은 영취산에서 석가가 법화경을 설법하던 영산회상을 상징하는 건물로 일명 팔상전이라고도 부릅니다.

 

 

 

 

 

 

 

 

 

 

 

 

 

 

 

공양간

 

 

 

 

 

 

 

 

무량사 당간지주

 

천왕문 오른쪽 담 바깥에 충남 유형문화재 당간지주가 서 있습니다.
절에 행사와 의식이 열릴 때 당(幢0이라는 깃발을 내거는데 깃발 거는 긴 장대를 당간(幢竿)이라고 하고
당간 양쪽에서 당간을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持柱)라고 하지요.
돌기둥 안쪽 면에 구멍을 두 개씩 뚫어 당간을 고정시킨답니다. 
아담하고 소박하게 세운 고려 전기 작품이라고 합니다.
   

 

 

무량사의 부속 암자인 태조암입니다

 

 

 

태조 이성계가 기도하던 곳이라 태조암이라 합니다만 사찰이라기 보다는 민가처럼 보입니다.

 

 

 

무량사 일주문 입구에서 여기까지 800m 라고 적혀 있으나 실제론 꽤나 먼거리를 걸어와야 합니다.

 

 

 

태조암에서 내려와 도솔암을 올라 조심스레 다가갑니다.

   

 

 

도솔암도 무량사의 부속암자입니다.

도솔암 현판을 건 요사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에 앞뒤로 툇간을 둔 형태로서 내부는 온돌방과 부엌으로 만들어 승려들의 참선수행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툇마루에 작은 범종을 두고 벽에는 신장탱을 걸어 두었으며 자연석으로 기단과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워 도리를 결구한 민도리집입니다.

처마는 홑처마로 구성하고 한식기와를 올렸는데 지붕은 맞배와 팔작을 섞은 형태입니다.

 

 

 

도솔암보다 약간 높은곳에 있는 산신각입니다.

 

 

 

도솔암의 기도공간인 칠성각과 산신각을 하나의 건물로 지었으며 정면 2칸, 측면 1칸의 소규모 전각으로 도솔암보다 약간 높은 곳에 있습니다.

자연석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에는 창방을 걸어 익공을 결구하였는데 물익공 형태입니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한식기와를 올려 맞배지붕을 만들고 좌우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습니다.

내부에는 뒷벽과 우측벽에 붙여서 ㄱ자형 불단을 놓고 칠성탱, 산신탱, 독성탱 2폭, 산신상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현판은 칠성각과 산신각 두 개만 걸었지만 안에는 독성까지 봉안하고 있어 일반적인 의미로 삼성각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건립시기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1931년 무렵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요사채는 최근 건립한 건물로 승방 및 창고 등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도솔암의 풍경으로 스님은 보이지 않고 찾는이도 별로 없어 보입니다.

 

 

 

들어갈땐 무량사 일주문에 萬壽山 無量寺이라 써있는데 나갈때 일주문 안쪽에는 광명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설정스님의 불경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