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尹奉吉) 의사(義士) 생가(生家)
1911년 봄 매헌 윤봉길은 부친을 따라(4세때) 이곳에 와서 살았으며 1930년 만주로 망명하기 전까지 민족운동을 펴시던 터전입니다.
조국(祖國)의 독립과 겨레의 자유를 되찾고 민족정기(民族正氣)를 세우고자
고귀한 생명(生命)을 바친 수 많은 순국선열(殉國先烈) 중에서도 우뚝 솟은 분이 매헌 윤봉길 의사(義士)입니다.
윤의사의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고려조 명장(名將) 윤관(尹瓘) 대원수의 28세손으로 尹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도중도(島中島)에서 윤황(尹土黃)공과 경주 金씨 원상(元祥) 여사의 장남으로 출생하였습니다.
관명은 우의(禹儀)이고 봉길(奉吉)이 별명이며 호는 매헌(梅軒)입니다.
尹의사는 6세부터 한문을 배웠고, 11세때 덕산(德山) 보통학교에 입학, 신교육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3ㆍ1 운동을 계기로 일제 식민지 교육에 반대, 자퇴하고 최병대(崔秉大) 문하(門下)에서 한학(漢學)을 배우기 시작하여
1921년에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선생의 오치서숙(烏峙書塾)에 들어가 사서오경(四書五經)을 통독하며 유학(儒學)에 심취하였습니다.
15세때 성주 배씨 (裵氏) 용순(用順) 규수와 결혼하고 이 무렵
오치시회(烏峙詩會)에 자주 장원하여 문명(文名)을 떨치며 오추(嗚椎), 옥타(玉唾), 임추(壬椎) 등의 세가지 시문집을 지었습니다.
한편 윤의사는 이 무렵부터 신문잡지를 구독하고 신학문 서적을 탐독 열심히 신사조를 수용하였습니다.
윤의사는 19세 때인 1926넌부터 야학(夜學), 독서회(讀書會), 강연회(講演會) 등을 주재하며 농촌개혁운동(農村改革運動)에 앞장섰습니다.
그 이듬해에는 농민독본(農民讀本)을 저술하고 1928년에는 부흥원(復興院)을 세워 농촌자립을 위한 협동조합운동(協同組合運動)을 주도하였습니다.
이어 1929년에는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여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한편, 위친계(爲親契)와 수암체육회(修巖體育會) 등도 운영하였습니다.
윤의사는 23세때인 1930년 3월 조국독립운동(祖國獨立運動)에 헌신(獻身)하려는 장지(壯志)를 품고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란 글귀를 남기고 망명(亡命)길에 올라 선천(宣川)에서 일경에게 피검되기도 하였으나
월여(月餘)만에 풀려나자 곧바로 압록강을 건너 만주(滿洲)를 시찰하고 대련(大連)를 거쳐 청도(靑島)에 이르러 잠시 동포가 경영하는 사업에 취업하였습니다.
그 이듬해 5월 목적지 상해(上海)에 도착,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끌던
백범(白凡) 김구(金九)를 찾아 살신구국(殺身救國)의 큰 뜻을 밝히고 주근야독(晝勤夜讀)하며 대지(大志)를 이룰 때를 기다렸습니다.
일제는 이해 9.18사변을 일으켜 만주(滿洲)를 유린하여 위만주국(僞滿洲國)을 세우고,
이어 이듬해인 1932년 1월 28일 상해(上海)사변을 일으켜 중국본토(中國本土) 침략을 시작하였습니다.
일제는 이런 속에서 그들 일왕(日王)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기하여 상해전승기념축전을 홍구공원에서 개최한다고 공표(公表)하였습니다.
尹의사는 이때를 기하여 대망(大望)의 역사적인 상해(上海) 홍구공원(虹口公園) 의거를 결심하여 4월 26일
한인애국단원(韓人愛國團員)이 되어 태극기 앞에서 “나는 적성(赤誠)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고 선서하고 27일과 28일 홍구공원을 답사하면서 의거 결행에 만전을 도모하였습니다.
마침내 의거일인 1932년 4월 29일, 尹의사는 아침일찍 金九 단장과 아침식사를 마치고
수통과 도시락으로 위장된 폭탄을 金九 단장으로부터 받아 가지고 오전7시 50분경 홍구공원에 입장하였습니다.
경축식전 중앙 높은 단상에는 침략군 총사령관 육군대장 시라카와요시노리(白川義則)와
주중국공사(駐中國公使)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등 일곱명의 상해사변 전범(戰犯)들이 천벌(天罰)를 기다리고 단상에서 도열하고 있었습니다.
尹의사는 경축전의 행사가 관병식(觀兵式)을 마치고 축하식순으로 일본국가가 제청되고
그것이 끝날 무렵 도시락 폭탄은 땅에 내려놓고 어깨에 메고 있던 수통폭탄의 안전핀을 뽑고 앞으로 전진하면서 단상 위로 힘껏 투척하였습니다.
그 폭탄은 그대로 단상도열자들 면전에 명중하면서 폭발되어 천지를 진동하는 광음을 내고 경축식장이 순식간에 침략자의 천주응징장(天誅膺懲場)으로 돌변하였습니다.
이때가 오전11시 40분경입니다.
결국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은 전신 24개처의 파편을 맞아 신음하다 미구에 사망하고,
해군 함대사령관 노무라 요시사부로(野村吉三郞) 해군중장은 실명하고, 제 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육군중장은 다리가 절단되었습니다.
또 주중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는 다리가 부러져 쩔둑발이가 되었고,
가와바다 사다쓰구(河端貞次) 거류민단장은 창자가 터져 즉사하였고,
주중 총영사 무라이(村井倉松)와 민단간부 토모노(友野盛) 등도 각기 중상을 입었습니다.
尹의사의 이 의거는 온 겨레는 물론, 일제의 침략을 질시하던 중국 관민들이 기뻐하여 마지 않았습니다.
그 보다도 尹의사의 이 의거는 역사의 순리(順理)를 거역한 일제의 한국 침략과 그를 이은 중국 침략을 응징한 것으로 동양근대사상 중요한 의의를 지녔습니다.
더욱이 尹의사의 이 의거와 순국은 저상(沮喪)하던 한국독립운동의 새 전기(轉機)를 마련하고 나아가 한중공동항전(韓中共同抗戰)의 큰 계기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尹의사의 살신구국(殺身救國)과 동양평화(東洋平和)를 위한 숭고한 정신(精神)을 영원히 기리게 되었습니다.
尹의사는 의거현장에서 체포되어 그 해 5월 25일 일제 군법회의에서 단심으로 사형을 언도받았습니다.
그 후 11월20일 일본 오오사카(大阪)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32년 12월18일 가나자와(金澤)시 위수(衛戍)구금소로 이감(移監)되었고
가나자와(金澤) 교외 미고우시(三小牛) 공병(工兵) 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여 총살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尹의사가 이와 같이 순국한 때가 1932년 12월 19일 오전7시 40분경이었고 향년 25세이었습니다.
순국현장 인근 쓰레기 하치장 통로에 매장되었던 尹의사의 유해는 해방 후
1946년 6월 30일 조국에 반장되어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고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尹의사의 육신(肉身)은 비록 25세 짧은 일생(一生)을 마쳤으나 숭고한 정신은 천추(千秋)에 길이 빛날 것입니다.
혈육(血肉)으로 종(淙), 담(淡)의 형제를 두었으나 민족정기의 후계자는 백대에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윤의사의 사상형성에 있어서 유전상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조부 윤진영과 자당 김원상 여사 입니다.
조부의 근면성과 개척정신, 자당의 선비로서의 기질과 훈육은 윤의사의 삵괭이 같은 승부근성과 책임(신의)을 존중하는 독불장군의 기백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후 성주록 훈장의 오치서숙에서 사서삼성을 깨우치는 동안 "죽을 때 죽어서 오래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을 터득하였고
당시 유생들의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된 홍성유고부식회 회원이 되어 해외 독립운동의 정보도 많이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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